그 중에도 그에게 가장 흥미를 가진 사람은 전 내각 정보국장인 정일만이었다. 군 정보기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채명이 국무회의나 비대위에서 정부의 부도덕성에 대해 강경 발언을 계속한 다음날이었다.

스캔들 기사를 많이 써 장안에서 가장 인기가 있다는 주간 잡지의 한 기자가 여류 화가 방수진의 화랑에 왔다. 방수진은 수 년 전부터 강남에 있는 화랑 하나를 인수해 직접 경영하고 있었다.

“방 선생님 요즘 좋은 소식 들리던데요?”
여기자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방수진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주간지의 기자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틀림없이 엉뚱한 스캔들로 잡지를 장식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로맨스그레이라고나 할까? 아니 방 선생님의 경우는 그레이는 아니지요.”
여기자는 더욱 생글거렸다.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괜히 헛소문 내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방수진도 얼굴에 웃음을 띠고 농담처럼 받아 넘겼다. 그러나 여자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정채명의 얼굴이 얼른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기가 망신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채명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 더 걱정스러웠다.
“로맨스란 원래 아름다운 일이니까 뭐 그렇게 꼭 감출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도대체 상대가 누구라는 겁니까?”

“그걸 물어보러 왔는데...그 분 이름만 대면 우리나라 사람은 다 아시는 분이라고...’
‘그 사람과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방수진은 자기가 이 맹랑한 기자에게 말려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우에는 무조건 화부터 내고 한마디도 상대해 주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선배들이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최근에 상대하신 분은 정계의 거물이라는 소문인데...”
“아니 그럼 내가...”

방수진은 더욱 난감했다. 그렇다면 한 사람도 아닌 여러 남자를 상대로 일을 벌이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도대체 누가 이런 터무니없는 악질적인 제보를 했단 말인가?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타락한 여자로 보인단 말이에요?”

‘로맨스란 타락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지요. 멋있는 사람, 용기 있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요.”

‘난 용기도 없고 멋도 없는 여잡니다. 더구나 로맨스 같은 것은 더더욱 없는 여자니까 딴 데 가서 알아보시죠. 정말 로맨스 같은 소리하고 다니네.”
“연인의 신분을 보호하고자 하는 심정은 ...”
“이거 왜 이래요!”

방수진은 이쯤에서 고함을 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나에 대해 단 한 줄이라도 어쩌구저쩌구 하는 얘기를 그 저질 잡지에 싣기만 해봐요.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당장 명예 훼손으로 고소라도 하고 말거니까.”
방수진이 악을 썼다.

“뭐라고요? 저질 잡지라고요? 우리 주간지를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명예 훼손으로 어떻게 한다고요? 하하하... 그 말은 우리 사장이 해야 할 말이군요. 이봐요 방수진! 정신 똑똑히 차리고 들어. 당신의 지저분한 남자 스캔들은 확실한 제보를 해 준 데가 있어요. 늙은이와의 침대 위에서 한 짓을 다 알고 있단 말입니다. 치사한 늙은이와 강아지처럼 등 뒤에서 헐떡거리는 정사 장면까지 증거로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냥 기사를 써 버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의 변명이라도 들어보자고 온 것인데... 저질 잡지가 어떻다고요?”

방수진은 앞이 캄캄했다. 그럼 이자들이 자기와 정채명의 못 볼 장면들을 다 촬영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는 정채명이 야당 투사 시절에 당한 일들을 생각했다.
“만약 그 따위 허무맹랑한 기사를 썼다가는 온전하지 못할 줄 알아요. 그건 전부 모략이에요.”

악을 쓰던 방수진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여기자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돌아갔다.
여기자가 나가자마자 방수진은 정채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러 곳에 다이얼을 돌린 끝에 겨우 연결이 되었다.
“아니 수진이가 웬 일이야?”

정채명은 별로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큰일 났어요.”
방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전화하는 여자의 눈에서는 금세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무슨 소리요?”

“주간 잡지사 여기자가 찾아 왔다 갔어요.”
“뭐야?”
정채명의 목소리도 차분하지 만은 않았다.
“글쎄 그 못된 여기자가 로맨스그레이를 취재하러 왔다면서 내가 침대 위에서 어떤 늙은이... 미안해요.”

“하하하... 그거 재미있는 이야기군. 그래 방수진 여사도 그런 재미를 볼 때가 다 있어요? 나도 그런 재미나 좀 보았으면 좋겠는데... 늙은 할망구가 눈이 등잔만 해가지고 지키고 앉았으니 연애도 한번 못해보고...”
“예?”

정채명의 엉뚱한 소리에 방수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나 방수진이에요.”
여자는 정채명이 혹시 자기를 딴 사람으로 착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요. 강남 화랑의 방수진 화백. 여류 중의 여류를 내가 아무리 무식한 정치꾼이라도 왜 모르겠습니까? 그래 그런 여기자 퇴치법은 상대를 않는 것입니다. 방 여사가 진짜 로맨스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대꾸를 않는 것이 최고지요. 가만 있자 나도 갑자기 늙은 여편네 생각이 나는군. 7시쯤 집에 들어가 볼까? 자 방 여사 그럼 이만...”

정채명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까? 정채명이 저렇게 엉뚱하게 변하다니...”
방수진은 충격으로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한참 만에 그녀는 그 이유를 알았다.
“도청 때문이야.”

그들의 전화를 어느 정보기관에선가 도청하고 있다는 것을 정채명이 알기 때문에 능청을 떤 것이 아닌가.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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