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 경감은 여기 저기 다니는 동안 이 곳에 사람이 없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만약 백장군 일당이 인질들을 이 곳에 수용하고 있었다면 곽 경감은 한발 늦은 셈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처음에 들어갔던 강의실 같은 곳으로 가 보았다.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나절이 걸린 그의 수색은 헛수고였다.
곽 경감이 지쳐서 마당에 나와 빈 상자 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을 때였다. 마당 쓰레기 더미 속에 쓰레기와 어울리지 않는 물건 하나가 눈에 뛰었다. 
그것은 핑크 빛의 여자 브래지어였다. 

쓰레기 속에 여자 브래지어가 섞여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 브래지어는 달랐다. 전혀 때가 묻지 않아 깨끗했다. 
곽 경감은 그것을 주워 들었다. 새것이 틀림없었다. 버린 지도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브래지어의 이곳 저곳을 살피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김순주’
곽 경감은 글씨를 보고 깜짝 놀랐다. 

김순주란 외무장관 부인 이름과 같기 때문이었다. 동명이인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새 브래지어에 이름을 써서 버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곽 경감은 그 외에도 급히 사인펜으로 쓴 것 같은 글씨를 더 발견했다.
‘678932’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분명히 여자가 브래지어에 메시지를 황급히 적어서 누군가가 보라고 던진 것 같았다.             

60.여자의 브래지어 메시지

김순주가 납치된 외무 장관의 사모님이 틀림없다면 그들은 이 곳에서 황급히 다른 곳으로 이동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자기들을 구출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남겨야겠는데 적당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브래지어를 풀어 메시지를 남긴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여자의 브래지어가 아무 곳에나 떨어져 있다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민독추 집행부는 정부 쪽에서 그들의 위치를 알아냈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곽 경감은 생각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숫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곽 경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것을 호주머니에 잘 간직했다. 그리고 공장 안을 다시 살펴보았으나 더 이상의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건물 뒤에 있는 커다란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음식 찌꺼기를 버려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거기서 불에 태운 종이쪽지들을 발견했다. 
유심히 살펴보았다. 똑같은 종이가 여러 개 남아 있었다. 무엇인가를 쓴 것 같았는데 알 수가 없고, 끝 부분에 모두 ‘지역 경제국’이라고 인쇄된 글씨를 발견했다.
곽 경감은 그것도 호주머니에 넣고 그 공장을 나왔다.

공단 거리는 벌써 퇴근 시간이라 아가씨들이 홍수처럼 공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곽 경감은 그 물결에 섞여 공단을 나온 뒤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조준철의 하숙집으로 갔다.
“후후후... 경감님도 참. 겨우 증거라고 가져 온 것이 그래 여자 브래지어 타다 남은 메모지들이에요?”

조준철은 곽 경감이 내 놓은 것을 보고 웃었다.
“글씨를 잘 보아. 그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곽 경감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전화번호가 아닐까요?”

“전화 번호? 678932니까 67국에 8932?”
곽 경감은 그것이 단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밖에 나가서 전화를 걸어 봐요.”
조준철의 의견대로 그들은 밖으로 나와 동네 근처의 공중전화에 매달렸다.
다이얼을 돌리자 뚜우하고 신호가 갔다.
“여보세요.”

수화기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가 67국에 8932입니까?”
“예, 구청 총무과입니다.”
“구청이라구요?”
“누구를 찾으시는지요?”

“아, 아닙니다.”
곽 경감은 전화를 끊었다. 구청 총무과라면 그것이 납치범들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건 아무래도 전화번호는 아닌 것 같아.”
두 사람은 근처의 조그만 술집으로 들어갔다.
“전화번호가 아니라면... 날짜? 67년 8월 9일.”
“그러면 뒤에 남는 32는 무슨 뜻이 있어요?”

조준철이 이의를 달았다. 그렇다 날짜도 아닌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소주 한 병을 시켜 그 것이 반병으로 줄 때까지 해답을 찾지 못했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조준철이 소리쳤다.
“아, 알았다. 그건 자동차 번호가 아닐까요?”
“자동차 번호?”

그 말이 그럴 듯 했다.
“678932... 서울 6에 78932...”
“그것도 아닌데. 자동차 번호는 네 자리 숫자인데 78932라면 다섯 자리수가 아냐?”
곽 경감이 실망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더 두고 연구하기로 하고... 그 종이쪽지에 인쇄된 지역경제국이란 뭘까요?”
조준철이 물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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