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게 아주 단단히 물들었군. 어디 그 주둥이가 언제까지 살아 있는지 보자. 벗어!”
수사관이 이번에는 마지막 남은 팬티를 손으로 가리켰다. 벗지 않으면 벗기겠다는 태도였다.
여자는 약간 주춤 하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빨리 못해!”ㅁ여자는 더 이상 버텨 보아야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그 것을 벗어버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고 주저앉았다.
김명희를 비롯한 여자 네 명에 대한 이상한 심문이 계속 되었다. 
형언할 수 없는 야비한 방법이 모두 동원되었다. 여자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이 뒤따랐다. 고통뿐 아니라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이러한 고문이 계속되는 동안 성유 정보국장에게는 합동 수사본부로부터 긴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뭐야? 또 그런...”

보고를 받던 성유 국장이 화를 벌컥 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어떤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아 ‘쇠얼음’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였다. 그런데 벌컥 화를 내는 것을 보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놈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야”

성유를 화나게 한 보고는 합동 수사본부에서 심문을 받고 있던 사람이 자살을 했다는 보고였다. 그런 일은 합동 수사본부가 설치된 이후 두 번 째 일어난 일이었다.
자살한 사람은 연립주택 지하에서 여자 근로자들과 함께 잡혀 온 박인규 교수였다.
그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3층에서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을 해버렸다.

이 불상사는 곧 총리에게까지 보고되었다. 그러나 총리실에서는 국무회의나 비대위에 알리지 않았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처리하라는 지시만을 내렸다. 그러나 그 일이 결국에는 세상에 알려지고 나중에 중요한 정치 문제로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김교중 총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변사 사건으로 처리되어 가족에게 통보되어 표면상으로는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합동 수사본부에서는 이런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문의 성과도 있었다.
박인규 교수와 함께 연행된 학생 중에 백성규의 행방에 관해 자백을 한 사람이 있었다.
“부평 공단에 자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이 정보에 따라 부평 공장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인질이 된 국무 위원 부인 중 첫 번째 희생자인 해군 장관 부인 차영순 여사가 시체로 발견된 곳이 김포와 강화 사이의 국도였었다. 
그렇다면 인질들이 그곳에서 가까운 부평 공단에 수용되어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는 추리가 성립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 수용하자면 공장 건물이 가장 무난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합동 수사본부의 요원 수십 명이 부평 공단에 투입되고 공단 외곽은 무장한 군 병력으로 포위되었다. 작전 훈련이라는 핑계였다.
공단에 들어간 요원들은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모든 공장의 내부 시설을 안전 점검이라는 이름으로 드나들었다.

그러나 수상한 공장은 좀체 발견할 수가 없었다. 공단 안에 숨겨진 밀수품이나 마약류 같은 범칙물자는 많이 발견했으나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58. 공장 구석 남녀의 신음소리

수배 상태에서 민독추의 근거지를 쫓고 있는 곽 경감은 밖에 나갈 때는 단단히 준비를 했다. 우선 백설처럼 하얀 가발을 쓰고 역시 하얀 콧수염을 달았다. 변장을 하고 거울 앞에 선 곽 경감은 스스로 웃음이 나왔다.

나이보다는 한 스무 살은 더 늙어 보였다. 아니 늙어 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상당히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곽 경감은 조준철의 하숙집에서 나와 전철을 탈 때나 길을 걸을 때 자꾸만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혼자 쓴웃음을 웃었다.

그는 우선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 동안 별일 없수? 밥은 제대로 자시구 다니는 거유?”
아내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내가 주책 없이 왜 이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 걱정은 말아. 나미는 학교 잘 다니구?”
“지금 방학이잖아요.”

“참 그렇군. 누구 날 찾는 사람 없었나?”
“아무도 없었어요. 강 형사가 어제 낙지 사가지고 왔다 갔어요. 아직 냉장고에 있으니 빨리 들어 오셔서 잡수어요.”
“뭐? 강 형사가? 그 녀석 내가 집에 못 가는 줄 뻔히 알면서... 그래 뭐라고 했수?”
강 형사는 곽 경감이 술안주로 낙지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사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을 때는 포장마차에서 낙지 안주로 밤새워 술을 마시며 고주망태가 되어 수집해 놓은 자료도 흘려버려 낭패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신이 곧 들어와 이 낙지 안주하고 약주 마실 테니 염려 말라고 하더군요. 정말 언제 들어오시는 거예요?”
“염려 마. 죄 짓지 않았는데 무슨 일 있을 라고. 나 다시 연락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혹시 자기 집 전화를 도청하고 있다가 지금 전화 거는 장소를 추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곽 경감은 문득 합동 수사본부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다.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제4부의 사무실로 전화를 넣었다. 신 대령에게 자기는 어떻게 되는지 좀 물어 볼 생각이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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