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찾으십니까?”
“저어... 신동훈 부장님을 찾는데요.”
“신 대령요? 거 어딥니까?”

전화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무뚝뚝하고 불친절했다. 그렇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지금쯤 도망가 있어야 할 전광대의 목소리가 틀림 업었다.
“당신은 전광대 씨 아니오?”

곽 경감은 반갑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구경하던 사람은 변장까지 하고 도망 다니기 바쁜데 정작 수배 당사자는 버젓이 출근하고 있다니...
“하하하... 이게 누구야? 곽 경감 아니오?”
“당신은 정말 전광대씨요? 어떻게 된 거요?”
곽 경감은 갑자기 세상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 변장 같은 것하고 남의 눈치보며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재빨리 머리를 스쳐갔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되는교? 나 없으면 하루라도 수사가 제대로 될 것 같아요? 여기 지금 임채숙이 같이 새빨개진 젊은 년들 수두룩하게 데려다 놓았어요. 야들 내가 손 안보면 누가 봅니까?”
“그럼 우리는 수배가 해제된 겁니까?”

“해제요? 범인 수배하는 게 뭐 아이들 장난입니까? 해제는 무슨 해제요.”
“예? 그럼 전형은 어떻게 출근을 했단 말입니까? 아무도 잡으러 오지 않아요?”
“허허허... 날 잡으러 온다구요? 허허허...”
그는 수화기가 찢어질 듯이 큰 소리로 웃었기 때문에 곽 경감은 귀에서 수화기를 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도 출근해서 수사에 합류해도 됩니까?’

“글쎄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잡혀 주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야 여기 하루라도 빠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지만 곽 경감이야 좀 쉬어도 되는 것 아닙니까?”
곽 경감은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 참 만에야 그는 통빡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이 갔다.
정작 일을 저지른 장본인은 고문 기술자라고 하여 겉으로는 수배만 시켜 놓고 사실은 그 못된 일을 계속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무 죄 없는 자신은 수배되어 도망 다니는 역할을 해야 하다니...
“거기 신 대령 있어요?"
곽 경감이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안 계신 것 같은데요. 어제 백성규네 꼬마들을 잔뜩 잡아와서 지금 그것들 털어 내느라고 바쁘거든...”

“도대체 지금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거요? 죄 없는 나는 도망 다니게 해 놓고..”
“곽 경감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요? 그럼 나는 죄 지은 놈이란 말이오?”
전광대도 화가 난 듯 거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렇지 않소? 여학생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은 누구요? 순진한 여학생 벗겨놓고 야들야들한 사타구니 솜털 가지고 장난친 사람은 누군데요? 그런데 또 그런 짓을 계속하라고 당신은 감싸고...”
“이 양반이 말이 좀 심하잖아. 이게 모두 내가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짓이오? 이게 모두 나라와 민족을...”

“나라와 민족 좋아하네. 여학생 거시기에 대고 성추행이나 하는 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짓이요? 나는 이제 도망이나 다니지는 않겠어. 나도 모든 사실을 폭로하고 말거야. 더러운 놈의 세상!”
“아니? 곽 경감! 곽 경감!”

전광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곽 경감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광대와 입씨름해 보았자 무슨 변화가 오지 않을 것이란 것을 잘 아는 곽 경감은 전화를 끊은 뒤에도 허탈해서 아무 일도 하기 싫었다.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혼자 파고다 공원에 가서 이리 저리 쏘다녔다. 부조된 4.19 의거 학생 영웅 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3.1독립 만세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빈 의자에 걸터앉았다. 바람이 찬 데도 노인들이 여러 명 나와 앉아 햇볕을 쪼이고 있었다. 곽 경감도 한참 동안 앉아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웬일인지 마음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렇지. 이렇게 주저앉아서는 안 되지. 백성규의 근거지를 찾고 임채숙도 찾아내야지. 그리고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야 한단 말이야.”
곽 경감은 이렇게 다짐하고는 일어서서 구로동으로 향했다.
며칠 전 조준철과 함께 가서 문제의 공장인 미성, 대진, 남서울 등 세 곳의 봉재 공장 위치를 확인해 두었었다.

그는 우선 규모가 가장 큰 미성이란 곳엘 가 보았다. 그는 노량 기업에서 납품 때문에 온 중역이라고 속이고 정문 경비실을 통과했다. 정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원이 범죄자들이나 테러범 같지는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공장 안은 대단히 넓고 조경이 잘 되어 있었다. 건물도 세 동이나 서 있었다. 그는 가장 안쪽에 있는 건물로 가 보았다. 그곳도 조경이 잘 되어 있었다. 손질이 잘 된 향나무며 집 채 만한 바위들이 인공 연못 사이로 잘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장 문을 열고 들여다 본 곽 경감은 바깥 모양과는 너무도 다른 작업 환경을 볼 수 있었다.

털실 같은 섬유 류에서 나는 자욱한 먼지 속에 귀가 따가울 정도의 기계 소음이 들렸다. 바깥보다 오히려 더 추운 것 같았다. 그 속에서 여자 근로자들이 구부리고 서서 열심히 기계와 싸우고 있었다.

그곳은 도무지 인질을 숨겨 놓았을 것 같지 않았다.
곽 경감은 문을 살그머니 닫고 다른 건물로 가 보았다. 그가 두 번째 들어간 건물은 제품 상자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창고였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