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십분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정일만 장관이 말했다. 실내는 꽤 넓었지만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그들이 줄담배를 피우며 밤 새워 회의를 거듭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총리 각하의 사모님 목숨도 관계된 일인 만큼...”
김 실장의 말을 김교중 총리가 가로막았다.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소? 지금 국가의 장래가 걸린 문제인데 내 마누라 목숨이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느냐 말입니다.”
그들이 논의하고 있는 것은 22명의 인질(이제는 20명만 남았지만)을 데리고 정권 내놓기를 주장하는 소위 민독추 집행부를 무력으로 일망타진하는 작전을 강행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현 정권의 독수리파인 이들의 결론은 인질들이 모두 희생되어 각료들이 홀아비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강공책을 쓰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모아진 것이다.
“감시에 이상은 없겠지?”

성유 국방장관이 조민석 총장을 보고 물었다.
“저희 부대가 철통 같이 외곽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대답은 변일근 여단장이 했다. 변일근 여단장은 정일만 장관과 사관학교 동기 동창이었다. 그는 군에 남아 있기를 고집해 머리가 희끗희끗하면서도 별 두 개만을 달고 있었다.

그들은 곽 경감보다 한발 먼저 민독추 집행부의 은거지를 찾아냈었다.
그러나 은거지가 노출되었다는 것을 눈치 챈 백성규는 인질들을 데리고 재빨리 그 곳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미 그들은 하늘과 지상 두 군데서 감시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울 청담동에 있는 어느 유치원에 숨어들어 갔다. 그들은 완벽하게 자신들을 숨겼다고 생각하는지 다시 총리실에 전화를 걸어 그들의 요구와 시한을 상기 시켰었다.

그러나 이제 칼자루를 쥐었다고 생각하는 정부 측은 그들의 요구를 금방 들어줄 것처럼 하면서 시간 끌기에 들어갔다.
이 작전은 어느 정도 들어맞아 내각이 성명을 내고 총 사퇴하는 시간을 이틀 더 벌어 놓았다.
이제 그 마지막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날이 밝자 대통령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국무회의를 열어 결정하라는 것이 각하의 말씀이오.”
총리가 정일만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김교중은 총리가 된 이후에도 장관인 정일만을 항상 의식했다. 심하게 말하면 그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갑론을박만 하다가 시기를 놓쳐 또 낭패 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성유 국장이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모두 긴장으로 표정이 굳어있었다.

“각하 말씀대로 하지요.”
한참 만에 정일만이 결단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두 시간 만에 다시 극비의 국무회의가 열렸다.
외무장관만이 연락이 끊겨 참가하지 않았다.
“섣불리 공격을 하다가는 우리 모두 홀아비가 되는 수가 있지요.”
고일수 법무장관이 신중 론을 내놓았다.

“무슨 소리야. 빨리 해치워야 해요. 어물어물 하다가 또 놓치고 말아요. 잡혀간 여편네 아니 사모님들이야 그날부터 목숨 내놓은 것 아닙니까? 여편네 때문에 나라를 망쳐도 된다는 겁니까, 뭡니까? 똑똑히 하세요.”
박인덕 장관이 또 횡설수설을 시작했다. 인질이었던 팽희자 여사가 희생된 이후 그는 밤낮 술이 취해 주정을 했기 때문에 아무도 상대를 하지 않았다.

어제는 난데없이 박인덕 장관이 비서실의 여 직원과 사무실에서 정사를 벌이고 있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총리실에 보낸 일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아랫도리만 벗은 여자가 책상을 짚고 뒤로 돌아서 있고 박 장관이 막 거시기를 집어넣으려는 순간을 찍은 것이었다. 박장관의 물건이 얼마나 거대하고 당당한지 모두 입을 짝 벌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박 장관을 모함하기 위한 다른 부서의 여직원이 조작해서 투서한 가짜뉴스란 것이 밝혀졌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어도 빨리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김휘수 재무장관도 강경론을 내세웠다.
“그러면...그럴 리야 없겠지만 다소 불상사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빨리 일을 끝내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구체적인 사항은 비상 대책위에 맡기기로 하겠습니다.” 
총리가 결론을 내렸다.

비대위라고 하지만 결정권을 행사할 사람은 정일만과 김교중이었다.
“오늘 정오를 기해 작전을 끝내도록 하지요. 총리 각하께서는 대통령각하에게 보고를 드리는 것이 좋겠군요.”
정일만이 담배연기를 길게 뿜으며 말했다. 평소에도 싸늘하게 보이던 그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작전은 우리 경찰이 주력이 되어야합니다.”
국무회의 때부터 한마디 말도 하지 않던 정채만 내무 장관이 최종 결정이 내려지자 한 마디 했다. 지금까지 경찰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작전은 육군부에서 해야 합니다.”
정일만 장관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서울 시내 민간지역에서의 일입니다. 경찰이 배제된 상황에서 무력행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정일만도 이번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지금 각처에 흩어져 있는 경찰 병력을 모아 보십시오. 정보가 누설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장한 집단 세력입니다.”
정일만이 양보할 것 같지 않았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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