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전번 산정 호수에서도 일을 망쳐 놓았군요. 이번에도 그 엉터리 변일근 장군이 지휘하는 특수 여단이 나서겠다는 것인 가요?”
정채명이 약간 흥분했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이 나라에 그의 부대만큼 충성스러운 병력이 또 어디 있습니까?”

정일만은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경찰에도 갑호 비상령을 내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십시오.”
보고 있던 김교중 총리가 거들었다.
“갑호 비상령이야 사건 나던 날부터 내려져 있지 않습니까? 설사 그들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서둘러서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됩니다. 사모님들도 이 나라의 국민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목숨을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정채명은 이 말 만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62. 작전실패, 여자포로만 둘

영동대교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청담동 언덕배기의 천사 유치원. 겉으로 보기에는 천사 유치원이란 말 그대로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 방학 때라 원아들은 아무도 없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이층 건물 벽에는 철 이른 산타클로스의 모습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초록색의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작은 건물과는 달리 꽤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는 유치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해 보이지만 주변의 높은 두 빌딩들에는 무장한 병력이 가득 차 있었다.
영동교 아래와 잠실 쪽에도 무장 병력으로 가득 숨어 있었으나 지나치는 행인들은 별로 눈여겨보지 않았다.
통행금지 시간에만 실시되던 다리 위 검문소 앞에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헌병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유치원의 동정은 어떤가?”

인근 빌딩 15층의 작전 지휘부에 나타난 총리가 변일근 장군을 보고 물었다. 시간은 11시 05분. 작전 개시 시간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유치원 왼쪽에 있는 빌딩의 4층에 전방 관측소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유치원 마당이 구석구석 잘 보입니다. 오피에서는 아직 아무 움직임이 없다는 보고입니다.”

“그럼 지휘본부를 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총리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잘못하면 적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적의 화력을 받기에 꼭 알맞은 위험한 곳이지요.”
그는 마치 적군 대부대와 대치하고 있는 전방 사령관처럼 말했다.
그들이 작전 지휘부로 쓰고 있는 건물은 평소 사람이 들어 있지 않는 신축 건물이었다. 청산 그룹에서 지어 놓은 33층의 사무실과 상가 복합 건물인데 모든 내부 장식이 끝나고 막 입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텅빈 청산 빌딩은 병력이 숨기에도 적당하고 지휘 본부로 쓰기에는 더욱 좋았다. 통신 시설이 다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비밀을 유지하기에 아주 적당했다.
평소 정권의 주변을 맴돌면서 놀라운 로비 솜씨를 발휘해온 청산 그룹이 이 빌딩을 선뜻 내 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8층에 설치된 정부 측의 지휘 본부에는 비상대책위에 소속된 국무위원들이 거의 모여 있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유치원의 조그마한 2층 건물에 20명의 아내들이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 곳을 내려다보고 있는 국무위원들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작전 시간 30분전입니다. 작전은 먼저 맞은편 건물에 있는 병력이 유치원의 뒷담을 넘어서 들어갑니다. 병력은 모두 30명인데 하이재킹에 대비해 특수 훈련을 받은 날아다니는 용사들입니다. 그들이 담을 넘기 직전 유치원 마당 위에 헬리콥터가 나타나 그들의 신경을 그 곳에 모으게 할 것입니다.”

변일근 장군이 총리와 정일만 육군장관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병력이라고 하지만 30명만으로 될까?”
정일만 장관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말하자면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병력이고 곧이어 앞쪽에서 2백여 명의 특수 요원들이 재빨리 진입할 것입니다.”

변일근 장군은 자신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장관들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긴장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곧 벌어질 상황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예측할 수 없는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유치원 안에 있는 저항 세력은 어떤가?”
김교중 총리가 다시 물었다.
“전혀 알 수 없습니다만 건물의 은폐된 구조로 보아 6~7명에 불과할 것으로 보입니다.”

“백장군 아니 백성규가 그 안에 있어요?”
고일수 법무장관이 물었다.
“아직 목격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그곳에서 지휘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직 아무도 건물 밖으로 나온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포위하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민석 육군 총장이 거들었다.
아무 말도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정채명 내무 장관이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는 천천히 걸어서 빌딩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뒤에 서종서 차관이 한 계단 떨어져 조심스럽게 미행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긴박한 30분은 금방 지나가고 인질 구출 작전이 시작되었다. 변장군의 말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헬리콥터 한 대가 유치원 마당 위에 나타났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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