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가투를 할 때도 무기를 가지고 나가야 한다고 했어요.”
가투란 가두데모를 말하는 것 같았다.
“또...”

“독재자들은 말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암살할 사람은 암살이라도 해야 한다고 그랬어요. 큰 목적을 위해서는 작은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논리였지요.”
“어제 여기 들렸을 때는 그 혼자 왔었나?”
신동훈이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예. 아니오. 나와 만난 사람은 백 장군님뿐이었지만... 누가 밖에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어요.”

“백 장군이라는 사람은 지금 무고한 시민들을 납치해 가지고 다니면서 심심하면 한 사람씩 죽이고 있단 말이야. 빨리 그를 찾아내지 않으면 많은 희생자가 나게 돼. 그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짐작이 갈 거야.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니 아는 대로 좀 얘기해 봐요.”
임채숙은 괴로운 표정이었다. 얼마 전 합동 수사본부에 잡혀 왔을 때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말 알 수 없어요.”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신동훈 대령이 임채숙을 심문하고 있는 동안 유치원을 공격하던 병력은 싱겁게 물러났다. 청담동 일대의 비상경계도 해제되었다. 비상령이 내리기는 했지만 시민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론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여기 더 있어 보아야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철수하지요.”

해가 뉘엿해질 무렵 성유 육군 장관이 총리를 보고 말했다. 청산 빌딩 8층에 임시로 마련된 지휘부는 허탈한 모습의 국무위원 몇 사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실내에 임시로 가설된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김영기 총리 비서실장이 수화기를 들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주목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던 김 실장이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를 김교중 총리를 향해 말했다.
“백성규입니다. 총리 각하를....”
그가 수화기를 내밀었다.
“뭐야? 그들이 어떻게 이 전화 번호를...”
총리가 수화기를 들었다.

“김총리! 정말 이러기요? 앞으로 7시간, 그러니까 오늘 중에 내각이 총사퇴하고 정권을 내놓지 않으면 인질은 모두 희생됩니다. 이제 더 참을 수가 없어요. 민독추의 최후 결정이오.”

64. 2대1 게임 또 하나요?
 
백성규가 청산 빌딩의 임시 지휘부에 전화를 걸어 최후통첩을 하고 있는 순간 그 빌딩의 지하에서는 숨 가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채명 장관이 8층 지휘부를 슬그머니 빠져 나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비상계단을 내려오고 있을 때 서종서 차관도 그 뒤를 숨어서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이 빌딩의 지상 층은 단장이 끝나 말끔하게 되어 있었으나 지하는 아직 공사중이라 폐쇄되어 있었다.

정채명은 폐쇄되어 아무도 눈을 돌리지 않는 지하실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지하실로 들어가는 통로는 위층에서 비상계단으로 내려와 들어가는 곳과 바깥의 자재 반입구 만이 열려 있었다. 정 장관과 서 차관이 내려 올 때 지휘부 문 앞을 지키던 경비 요원들은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서종서 차관은 며칠 전부터 정채명 차관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날도 그를 대단히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지휘부에 전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슬그머니 나가 공중전화를 거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김교중의 거미 부대를 비롯한 여러 정보기관이 그를 늘 감시하고 있었으나 특별한 보고를 하지 못했지만 서종서 차관의 눈은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정채명이 지하층으로 숨어 들어가고 그 뒤를 따라 서종서 차관이 슬그머니 지하층으로 들어가는 이상한 광경의 뒤에 또 다른 이상한 광경이 있었다.

그들 뒤를 또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다시 그들을 미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곽 경감과 조준철이였다.
곽 경감은 시경의 강 형사로부터 이상한 전화를 받고 이 빌딩으로 달려와 지하실에 숨어들었었다.

강 형사는 시경에 들어온 첩보 중에 그들이 찾아 다녔던 트럭의 넘버가 다시 수배되었을 뿐 아니라 특히 청담동의 그 빌딩 주변에 그 트럭의 출몰 여부를 주시하라는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곽 경감과 조준철은 그곳에 왔다가 그 곳이 어마어마한 감시 속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챘었다.

그들은 감시가 허술한 빌딩의 뒤쪽으로 가서 공사 자재가 쌓인 틈으로 해서 지하실로 숨어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들이 지하실에 숨어 바깥 동정을 살피고 있을 때 뜻밖에도 서종서 차관이 누구를 미행하며 지하실 계단을 내려오고 있지 않은가?

“경감님 저 사람이 내무 차관 서종서가 틀림없어요. 그런데 여기 뭣하러 왔을까요?”
조준철이 곽 경감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쉿! 아마 국무위원들이 모두 이 빌딩에 모인 것 같아. 조금 전에 정채명 내무 장관도 이리로 내려갔거든...”

“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장관님들이 무엇 때문에 이 빈 빌딩에 모였단 말입니까?”
“말소리를 낮춰. 우리도 따라 내려가 보자.”
두 사람은 발소리를 죽이고 캄캄한 지하 2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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