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에서 하는 짓들이 늘 이렇단 말이야. 도대체 허깨비를 쫓아 다녔단 말이야?”
박인덕 장관이 언제 왔는지 작취미성의 상태로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말 삼가 하시오. 총리 각하도 계신데...”
성유 국장이 벌컥 화를 냈다. 마치 작전이 실패한 것이 그의 탓이라도 되는 듯이 화풀이를 하려고 했다.

“뭐가 어쨌다구? 그래 독 안에 든 쥐라고 큰 소리 치더니 겨우 유치원 보모 두 명 잡아냈어? 잘한다 잘해...”
박인덕 장관이 계속 떠들자 그를 조민석 총장이 밀어서 의자에 앉혔다.
“그러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 가요?”
총리가 다시 물었다.

“백성규가 이 유치원 마당에서 목격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요원들의 카메라에도 분명히 찍혔으니까요. 저 유치원 여자들을 족치면 나올 것입니다.”
정말 유치원 보모 두 명 중 한 여자는 백성규와 관계가 있는 여자였다.
청산 빌딩에 임시로 마련된 내각정보국 지휘부에 붙들려온 두 여자 중 한 여자는 놀랍게도 임채숙이였다.

잠옷 바람으로 가슴을 다 드러내다시피 하고 끌려온 여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여자는 전에 백성규의 심부름을 하러 나타났다가 잡혀온 뒤 합동 수사본부에서 지독한 고문을 당했었다. 민독추의 특공대(?)가 나타나 여자를 빼내 가고 버젓이 고문을 폭로하는 기자 회견까지 열지 않았던가.

전광대와 곽영도 경감이 그 일로 지명 수배까지 당했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유치원 보모로 변신, 여기 숨어 있으면서 백성규와 연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 전번 같은 짓을 하면 여기서 살아나가기 어려울 줄 알아. 여긴 너를 구출하러 다시 올 백마 탄 기사도 없을 테니 말이야...”

신동훈 대령이 분을 못 이겨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씩씩거렸다.
“백성규 지금 어디 있어? 인질들은 어디 있느냐 말이다.”
신동훈이 탁자를 힘껏 내려쳤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임채숙의 목덜미를 쥐고 흔들었다. 잠옷이 북 찢어지면서 젖가슴이 그냥 드러났다.
“백 장군을 유치원에서 만나 것은 부인하지 않아요. 하지만 곧 떠났기 때문에 어디 있는지는 모른단 말이에요.”

임채숙은 침착하게 드러난 가슴을 찢어진 옷으로 가리면서 말했다.
“모른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 줄 알아? 우리가 또 당할 줄 알고? 운동권 계집년들이 독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우리는 그 보다 몇 배 더 독한 사람들이야.”
어느새 나타났는지 수배중이라는 고문 기술자 전광대가 떠들었다.
“백장군파가 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일과는 달라요. 우리는 순수한 민주주의 운동만 한단 말이에요. 나도 뒤늦게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았어요.”
임채숙의 입에서 엉뚱한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 무엇이라고 했지?”

신동훈이 귀가 솔깃해진 모양이었다. 여자 앞에 바싹 다가섰다.
“저 언니는 내 보내요. 아무 것도 몰라요.”
임채숙이 같이 끌려와 그때까지 오돌오돌 떨고만 있는 다른 보모를 가리키며 말했다.
신대령이 눈짓을 하자 요원 한 사람이 여자를 데리고 나갔다.
“너희들 조직과 백성규의 조직이 다르다는 뜻인 것 같은데 자세하게 설명 좀 해보아.”
“조직이라는 용어는 쓰지 마세요.”
임채숙이 신 대령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백 장군이 그 유치원에 임 양을 만나러 왔던 것은 사실이지?”
“부인하지 않겠어요.”

“무슨 일로 왔었나?”
“며칠 동안만 이 유치원을 쓰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거절했어요.”
“왜 거절했지?”
“내 맘대로 유치원을 비워 줄 수도 없었지만 그들이 하는 일과 우리가 하는 일은 목적이 같을지는 몰라도 수단이 달라요.”
“수단이 다르다?”

신 대령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백장군의 민독추는 너무 과격해요. 남독련 같은 학생 중심의 민중 운동은 순수한 민주주의 신봉자의 모임이지요. 하지만 민독추 사람들은 그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도 정당화시키거든요. 당신들하고 같아요. 아무리 목적이 고상해도 나쁜 방법을 써서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왜 처음에는 그들의 일을 도왔지?”
“그들이 그렇게 레디컬한 집단이라는 것을 늦게 알게 되었거든요.”
“어떤 폭력을 쓴단 말이냐? 직접 본 일이 있어?”
그때까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전광대가 걸걸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저 사람과는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임채숙이 전광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 썅년이 아직도 맛을 덜 봤군. 사타구니를 한 번 더 찢어 놓을까? 네년 구멍을 벌집 쑤시듯 만들어 놓기 전에 똑바로 말해!”
전광대가 화를 벌컥 냈다.

“당신은 좀 나가있어.”
신대령이 곱지 않은 눈으로 전광대를 흘겨보았다.
“대령님 저런 년은 슬슬 다루어서는 바른 말 하지 않습니다. 아예 홀라당 벗겨 쩍 벌려 놓고 조져야 돼요.”
“나가 있으래도!”

신동훈이 화를 벌컥 내자 그가 슬그머니 나갔다.
“그래 민독추 사람들이 어떤 강경책을 쓴다고 했지?”
전광대가 나간 뒤 신동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임채숙에게 물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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