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님, 마침 계셨군요.”
나이는 농산이 두 살이나 많아 월선은 늘 깍듯이 언니 대접을 했다.
“월선이가 올 줄 알았네. 은실이 때문이지?”
농산이 매무새를 고쳐 앉으며 월선을 건너다보았다. 타래를 튼 머리가 아직은 숯이 풍성했다.
“성님,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월선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했다. 해동원이 문을 닫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보다는 그 화가 달성 권번의 농산에게까지 미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농산은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나 헌병대의 주목을 늘 받아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기생 치고는 지식인으로 분류된 농산은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언동을 잘했기 때문에 요주의 인물이었다.
농산이 사귀는 사람들도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이 많았다. 불령선인이란 일본의 정책을 잘 따르지 않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일본 관리들이 싸잡아 하는 말이었다.
농산은 예를 들면 복명학교를 세운 김울산 여사라든지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탄 사건의 장진홍 의사 가문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기 때문에 눈총을 받고 있었다.
농산이 결정적으로 일인의 비위를 거스른 것은 대구부윤이 참석한 어느 술자리에서 이원록의 시 ‘청포도’를 가야금 가락에 맞추어 읊은 일 때문이었다. 이원록이란 이육사(李陸史)로 더 잘 알려진 안동 출신 시인이며 독립 운동가를 말한다. 육사는 평소 10여 차례나 투옥되었는데, 죄수로 있을 때 수인 번호가 264번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 번호를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4. 머리 얹겠다고 줄선 건달들
“동생, 너무 걱정 말게. 설마 그 일로 해동원 문을 닫게야 하겠는가.”
농산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태연한 얼굴을 본 월선이 영문을 몰라 다시 말했다.
“상대가 누굽니까? 사꾸라이 집안 아닙니까? 날아가는 까마귀도 떨어뜨리는 세도 집안인데. 해동원보다 철부지 선머슴 같은 은실이가 다칠까 보아 겁납니다.”
“나는 은실이가 대견스럽다네. 우리 권번에 그런 기개를 가진 기생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하하하.”
“참 성님도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월선은 의논하러 갔다가 더 큰 근심만 안고 해동원으로 돌아왔다.
“아니, 서방님.”
성중석이 해동원에 와서 월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석은 뜻밖의 제의를 해 월선을 놀라게 했다.
“오늘 월선에게 꼭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네.”
중석은 평소의 태도가 아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술 한 잔 하면서 천천히 이야기하시지요.”
월선은 간단한 안주상을 내왔다. 그리고 은잔에 정종 한 잔을 따르고는 말을 이었다.
“서방님, 어제는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너그럽게 보아 주십시오.”
월선이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를 했다.
“어제 일은 어제일이네. 너무 개의치 말게.”
“예? 그게 정말입니까?”
평소와 다른 중석의 태도에 월선은 또 한 번 놀랐다.
‘이 망나니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렇게 돌변했을까?’
월선은 내심 겁이 덜컥 났다. 중석의 행실을 잘 알고 있는 터라 더욱 긴장되었다.
중석은 정종 잔을 쭉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
“내 부탁 하나 들어 주시게.”
“예? 부탁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이 늙은 월선이 젖 먹던 힘이라도 다 내어서 하겠습니다.”
입맛을 몇 번 다시며 뜸을 들인 중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제 그 아이 말일세.”
“달성 권번 은실이 말이죠?”
“그 아이 다시 좀 만나게 해 줄 수 없겠나?”
“예? 다시 만나요?”
월선은 무슨 속셈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여기 해동원에서 말고 밖에서 좀 만나고 싶거든.”
“밖에서요?”
“그렇다네. 그 아이 성미로 보아 내가 다시 머리 얹어 주겠다면 절대 응하지 않을 걸세.”
“....”
“어젯밤 잠도 제대로 못 잤네. 은실이 얼굴이 눈에 아롱거려서...”
“은실이 얼굴이오?”
“그렇다네. 지금까지 기방 출입은 신물 나게 했지만 그렇게 정면으로 나와 맞서는 여자는 처음 보았네. 처음엔 화가 났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아이를 잊을 수가 없게 되어가네. 나를 쏘아보던 불꽃이 튀는 듯한 눈동자며 화난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 잊을 수가 없네.”
“크크크.... 서방님이 단단히 반하셨구려.”
“머리 얹고 어쩌고 하는 말은 집어 치우고 한 여자와 한 남자로 만나고 싶은 아이라네. 내 말 알아듣겠나?”
“이 월선이가 애송이 기생 하나 못 다루겠습니까?”
그러나 월선의 큰소리는 난관에 부딪히고 만다.
달성 권번장 농산은 월선이 다녀간 뒤 은실을 불렀다.
“어젯밤에 해동원에서 있었던 일은 들었다. 기생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너를 추천해준 김울산 여사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지 걱정되는구나.”
농산은 말을 그렇게 하지만 은실이 큰일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제가 처음이라 당황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은실은 고개를 숙인 채 들지 못했다. 오른 손가락으로 왼손 엄지의 손톱만 후벼 파고 있었다.
“성중석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내가 자세히 일러주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러나 너무 기죽어 있지 말거라. 그런 인물은 한번쯤 당해도 싸다. 솔직한 내 심정은 속이 후련하다. 우리 조선 기생 중에 이만한 배짱을 가진 아이도 있다는 것이 왠지 흐뭇하기도 하다.”
“철없는 제가 무슨 배짱이겠습니까? 잘못했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네 소문이 대구 유흥가에 쫙 퍼질 거다. 너를 찾는 한량들이 줄을 서겠구나.”
“예? 못된 년이라고 소문이 날 텐데요. 그렇지 않으면 성중석 서방님이 저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고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네 거시기에 금테라도 둘렀느냐고 소문이 나고 머리 얹겠다고 덤비는 한량이 줄을 설 것이다. 성중석 도령님도 너를 다시 보자고 할 것이다.”
농산의 예측이 맞았다. 해동원의 월선이 은실이를 보자는 전화가 왔다. 은실은 해동원에는 갈 수 없으니 다른 곳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월선은 은실이 그 곳에 갈 수 없다는 말에 비위가 확 상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에서 만날 수 밖에 없었다.
5. 기생이 무슨 프로레타리아야
은실은 교쪼(京町) 이정목에 있는 다방에서 월선을 만났다. 은실은 양장 차림으로 나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처음이라 놀라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권번장님께서 큰 꾸중을 내리셨습니다.”
“은실아. 일이 잘 풀리려나보다. 성 도련님이 너를 다시 보자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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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상우의 정치 추리 소설-방원, 복수의 칼] 58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