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실씨.
꼭 만나서 이야기 좀 나누고 싶으니 시간을 내 주시오. 요리 집이 아닌 딴 곳에서 만납시다. 야먀토마찌(大和町)에 있는 청요리 집 공화춘에서 만났으면 합니다. 내일 저녁 6시가 좋겠군요.
중석’

은실은 깜짝 놀랐다. 일본어로 쓴 쪽지가 꼬박꼬박 존대 말을 쓰고 있다는데 우선 놀랐다. 또한 요정이 아닌 청요리 집에서 만나자는 것은 기생 대 손님이 아닌 일대 일의 남녀로 만나자는 뜻으로 해석 되었다. 공화춘은 기생이 출입하는 곳이 아니었다. 일본 고위직 공무원들이 주로 드나드는 청요리 집이었다.
“성중석이 정말 나한테 반한 것일까?”

은실은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본인들의 대표적 음식점이 아카이시(明石)라면, 화교들의 대표적 음식점으로는 공화춘과 군방각이 있었다. 이곳은 조선 요정과는 달리 공식적인 연회나 접대가 자주 이루어지는 곳으로 기생은 특별한 경우 외에는 부르지 않는 곳이었다.

은실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성중석이 은실을 요정에서 만나지 않고 고급 음식점을 택한 것은 우선 기생 대 손님으로보다는 남자 대 여자로 만나자는 뜻일 것이다. 두번째 헌병대 사건에서 힘을 써 주었으니 마다할 수가 없는 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실은 권번장 농산 큰언니한테 상의를 했다.

“나가 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기생 머리 얹어주자는 수작은 아닌 것 같다. 갈 때 옷은 점잖게 양장으로 차려입고 가는 것이 좋겠다. 목 밑에까지 꽉 차는 흰 블라우스에 곤색 양장이 어울릴 텐데.”

“그 옷 구종심이한테 빌렸던 거예요.”
종심이란 은실이보다 조금 먼저 들어온 기생인데, 나이가 같아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인물은 뛰어난 편이 아니지만 마음씨가 착하고 은실을 잘 보살펴주었다.
“한 번 빌리나 두 번 빌리나...”

변변한 양장이 없던 은실은 농산 권번장 말대로 종심의 옷을 빌려 입고 공화춘으로 갔다. 체격이 비슷해 빌려 입었다고 볼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은실이 공화춘 현관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인사를 했다.
“장 은실씨죠?”
“예”

“이리 따라 오십시오.”
은실은 웨이터를 따라 안쪽, 외진 방으로 들어갔다. 웨이터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성중석이 웃으면서 일어섰다. 원탁이 가운데 놓여있고 식탁 위에는 화려한 꽃병이 놓여 있었다. 창밖으로 바깥 풍경이 잘 보였다.

“어서 오시오.”
중석은 두 손으로 맞은편 자리를 은실에게 권했다. 
“불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와주어서 내가 고맙습니다.”

“전번에는 무례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은실이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나는 다 잊어버렸소.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하하하.”
중석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헌병대 일도 감사를 올립니다.”

“이거 내가 마치 공치사나 받으려고 은실 씨를 보자고 한 것 같구먼. 우리 그런 쑥스러운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우선 음식부터 시키지요. 뭐 먹고 싶은 것 주문하세요.”
중석이 말을 마치며 손바닥을 두 번 탁탁 쳤다.
“예. 부르셨습니까?”
웨이터가 득달같이 달려와 두 사람 앞에 섰다.

“은실씨 좋아하는 것으로 시키시지요. 청요리는 워낙 종류가 많아서...”
은실은 중석의 태도가 전번 해동원에서 볼 때와는 너무나 달라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사람의 태도가 낮과 밤으로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말투도 공손하여 신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제가 뭐 청요리를 먹어봤어야지요. 서방님이 청하세요.”
“서방님 소리 좀 그만하시오. 내가 누구 서방인가 뭐.”
“그럼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은실은 미소를 살짝 흘리면서 물었다.
“그냥, 그, 뭔가 미스터 성이라고 하든지...”
중석이도 마땅히 무엇이라고 자기를 불러야 할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성 선생님이라고 부를게요.”

“내가 선생은 무슨 선생이야. 난 선생 소리 딱 듣기 싫은 사람이오.”
“그럼 성상, 아니 사꾸라이상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상(樣)’이란 일본 사람이 부르는 존칭이다. 사꾸라이(櫻井)는 성중석 가문의 일본 성이었다.
“은실 씨는 창씨개명했나요?”

“아뇨. 아버지가 워낙 그런 일에 관심이 없으셔서...”
은실은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 아버지 이야기는 끄집어내기 싫었다. 아버지는 지금 은실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만약 은실이가 달성 권번 기생이 되었다고 하면 당장 달려와 머리채를 끌고 갔을 것이다. 그 성격에 그냥 넘길 리가 없다.

중석은 사꾸라이 상 이라는 말에 얼굴이 잠깐 굳어졌으나 곧 웃으며 은실을 건너다보았다.
“일본 이름은 일본사람 앞에서나 부르게 두고.... 그냥 중석씨로 부르는 게 좋겠구먼.”
그때야 웨이터가 서 있는 것을 새삼 발견한 듯 중석이 말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청요리가 탕수육 아닌가요?”
중석이 은실이를 건너다 보자 은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탕수육 하나, 그리고 팔보채 하나...”

중석은 은실의 표정을 살피면서 천천히 주문을 했다.
“낮에 많이 먹을 수 있겠어요? 그러면 충분하겠네요.”
“그래. 그거 두개 하고 나는 우동, 우동은 어떤가요?”
중석이 다시 은실을 건너다 보았다.
“저는 기스면이 좋겠어요.”

웨이터가 나가려고 하자 중석이 다시 불러 세웠다.
“아사히 맥주 한 병.”
웨이터가 나가자 중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건넜다.
“은실씨, 권번 그만 둘 수 있어요?”

권번을 그만 둘 수 있느냐는 중석의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몰라 은실은 대답을 못하고 중석을 쳐다보기만 했다.
“내 말은 기생 족보에서 빼고 싶은 생각이 있느냐는 뜻이오.”
“그것이 제 직업이고, 제가 선택한 일인데 아직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그만 둘 생각은 없는데요.”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아요?”
“제가 할 만한 일이란 별로 없어요.”
“내가 도와주면 안 될까요?”
은실은 대답을 하지 않고 한참 있었다. 도대체 성중석이란 사람의 본심을 알 수가 없었다. 천하의 개망나니 오입쟁이로 이름남 부잣집 막내가 하는 말이라 무슨 꿍꿍이가 반드시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중석씨는 왜 저를 특별하게 대접하셔요? 왜 도우려고 하는데요? 저는 처음 만난 손님에게 행패를 부린 못된 신출내기 기생에 불과한데요.”
은실이가 진작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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