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가뭄이 심하긴 한가 보다. 털털거리며 비포장도로를 달려온 버스는 다시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꽁무니를 감추고 떠나갔다. 전국 도로 포장율이 61.4퍼센트라면서 서울에서 시외버스로 두 시간 반이면 닿는 이곳은 아직도 흙자갈길이다.

서울에서 천안까지는 고속도로로, 온양을 지나 예산읍까지는 매끄럽게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예산읍내서 출발하는 직행버스를 타고 첫번째로 정차하는 신양면까지 포장이 돼 있는데 신양면을 지나면서부터 송전면(松田面)까지는 비포장도로라서 20여 분을 털털거리며 와야 했다. 바로 이웃해 있지만 신양면의 관할군청은 예산군이고 송전면은 청양군에 속해 있어 도로 포장이 보릿고개 됫박 인심처럼 뚝 잘라진 것일 게다.

민기(民基)는 가방을 고쳐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찻길 옆에 선 미류 나무는 탐스러운 밑동 위로 풍성한 가지를 하늘로 치켜 올리고 2열종대로 서 있었다.
면사무소며 농협, 우체국,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시외버스가 경유하는 송전리(松田里)는 면의 중심지답게 꽤 번화했다.

공공건물은 농협 구판장과 창고 외에는 새로 눈에 띄는 것이 없었으나 상점은 여러 개가 생소하게 보였다. 중국 음식점이 하나, 밥집이 셋 늘어났고 다방이 둘, 찻집 겸 술집으로 보이는 카페가 하나 들어서 있었다. 호미나 낫 따위의 농기구가 아닌, 경운기 같은 농기계를 팔고 수리해 주는 집이 두엇 들어서고 가전품 대리점도 새로 생겨났으나 분위기는 10여 년 전과 거의 같았다.

학교가 막 끝난 시각인지 자전거포 앞에는 학생으로 보이는 소년들이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느라 부산한 모습이었고 서너 명의 여학생이 달뜬 목소리로 재깔거리며 분식집 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때문인지 마을은 학생들의 움직임 외엔 봄날의 고요 그 자체였다.
‘차 덜컹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내려서 이렇게 적막하게 느껴지겠지.’
민기는 지서로 향하면서 혼자 중얼거려 보았다.

면사무소 뒤에 숨바꼭질하듯 자리 잡고 있는 송전 지서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지서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아담한 단층 건물 주위를 둘러싼 개나리 울타리는 저녁 봄 햇살보다 화사한 노란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지서 현관으로 나있는 여섯 개의 계단 옆에 심겨 있는 진달래도 분홍 꽃을 보기 좋게 활짝 피우고 있고, 계단 양쪽 가장자리에 마주보고 서 있는 목련은 약간 무거워 보이는 꽃송이를 가느다란 가지에 힘겹게 매달고 있었다.

이런 정경을 보고 민기는 왜 어릴 적엔 이곳이 두려워 멀리 피해 가곤 했나 하고 돌이켜보며 현관문을 열었다.

“아니 이놈이 그래도 아니라고 잡아떼! 네 놈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했겠느냐, 이놈아.”
“이놈, 생사람 잡는 버릇 여전하구나. 그렇다면 증거를 대봐, 증거를.”

“이보시오 강 순경, 이걸 보면 알 수 있지 않소. 내가 하두 열이 나서 내 비닐하우스를 찢어 왔소. 자, 이렇게 구멍이 나 있지 않소? 그리고 이건 이놈의 집에서 찾아낸 장작이오. 여기 비닐 구멍하고 장작 단면하고 똑같지 않소. 이놈이 남의 농사 망치려고 작정하고 이 짓을 한 거요. 아무리 봄이 왔다고 해도 밤이면 한겨울같이 추운데 모종이 견뎌 내겠소?”

“이런 장작이 어디 한두 개냐? 내 농사짓기에도 바쁜데 내가 왜 빌어먹을 네 땅 밟으며 네 놈 밭에 가겠느냐?”
다투는 소리가 하도 커서 현관에 우뚝 선 민기는 싸우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자 빙긋 웃음이 나왔다.

강 순경이라 불린 경찰관은 서로 제 얘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여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여자처럼 선이 곱고 우유부단해 보이는 얼굴이, 손 귀한 집의 외동아들이나 딸 부잣집의 막내아들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 언쟁이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이 책상에 걸터앉아 서류를 들척거리고 있던 나이 지긋해 뵈는 또 한 사람의 경찰관이 무심히 고개를 돌리다가 민기를 발견하고는 서류를 덮어 두고 다가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새로 부임한 박민기 순경입니다.”
“아, 그래요. 내일이 부임 일자라서 내일 올 줄 알았는데... 나는 김승만 경장이오. 마침 지서장님이 계시니 인사드리지.”
처음에는 존대어로 시작됐던 말투가 어느 결에 반말로 바뀌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