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일의 할아버지는 독립 운동하는 사람에게 군자금을 몰래 대주다가 들켜 주재소에 불려가 매를 흠씬 두들겨 맞고 온 뒤부터 실성을 했다고 한다.

펄럭이는 것만 보면 무조건 움켜잡고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러댔고 나중에는 빨랫줄에 걸린 빨래, 심지어 동네 아낙의 치마까지 벗겨 움켜잡고 달아나며 만세 소린지 뭔지 모를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다가 해방 전해에 잠깐 제 정신이 돌아와 자식 얼굴까지 알아보더니, 어디서 구했는지 태극기를 가슴에 꼭 안고 죽어 있는 것을 송지호에서 건져냈다고 한다.

아버지가 실성하고 10여 년이 지나 태어난 원종일의 아버지는, 미친 자가 자식은 용케 만들어냈다는 수군거림과 저 애도 머릿속이 성치 않을 거란 호기심에 번득거리는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 속에서 자라났고, 종일이 할아버지가 군자금 대주고 있다는 것을 일본 순사에게 일러바친 옆 마을 송계리의 순임 할아버지를 어려서부터 눈을 흘기며 바라보더니 순임 할아버지가 죽고 나서는 순임 아버지와 그렇게 앙숙이 되어 지내는 것이었다.

원종일의 할아버지 뒤로는, 육이오 때 부모가 빨갱이의 대창에 찔려 죽는 것을 보고 기절하더니 머리가 돌아 버린 윤 씨네 둘째 딸, 월남전에 징집 당했다가 중도에 돌아와 사람고기 먹었노라고 매일 국사봉 꼭대기까지 올라가 참회하다가 아무 음식도 안 먹고 굶어 죽은 김 하사로 이어졌고, 온 동네 사람들의 기대를 잔뜩 받으며 서울로 유학 간 최 씨 종갓집 장손이 넋이 나가 돌아와, 데모하다가 고문당해서 그리 되었을 거다, 좋아하던 여학생이 다른 데로 시집가서 그렇다, 서울 깡패에게 몰매를 맞은 때문이라는 등 갖가지 구구한 억측을 뿌리기도 했다.

민기보다 서너 살 아래인 미란이란 처녀가 송전리에 새로 생긴 교회에 다니다가 서양귀신이 들려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의 10대 제자 이름을 붙여 부르고, 막달라 마리아라고 자칭하며 횡설수설하다가 서울에서 온 부흥 목사의 안수기도를 받고 나았다는 것이 가장 최근의 일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미란이가 나아서 맞선을 보러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민기는 형이 사우디에서 돌아오는 배에서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전보를 받았고, 어머니는 그 말을 듣자마자 실신하여 병원에 실려 갔다. 정신이 들고 나서도, 네 형은 내가 죽였다고 계속 울부짖는 어머니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면서 민기는 어머니가 미란의 뒤를 이어 송암리 광인이 되는구나, 송암리의 광기가 이렇게 멀리까지 미치는구나 하는 깨달음에 몸서리가 쳐졌다.

송암리의 마수 때문이라 여겨지니 민기에게는 어머니의 병세가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조금도 생기질 않았다. 이런 민기의 절망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은 민기 어머니의 병인을 찾아내었고, 병의 원인이 드러났으므로 큰 자극만 없다면 곧 완쾌되리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의사들이 말한 병인이란, 민기의 어머니가 ‘거믄애’이고 그에 대한 뱃사람들의 미신을 광적으로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거믄애란, 부인네가 아이를 낳고 첫번째 월경이 있기 전에 잉태되어 태어난 아이를 일컫는 뱃사람들의 속어이다. 이 거믄애가 배에 타면, 폭풍이 불어 배가 뒤집히거나 가라앉게 되는데, 당사자가 물에 빠져 죽으면 바람이 잦아들어 나머지 사람과 배가 무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배에 탄 사람이 몰살을 당한다고 한다. 어떤 뱃사람은 거믄애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았는데, 몸은 간 데 없고 사람의 태 같은 허연 껍데기만 둥실 떠가더라고 했다.

외삼촌과 연년생인 민기의 어머니는 소녀 때 생리가 시작되면서부터 자신이 거믄애가 아닐까 하고 걱정을 했다. 그러나 열 살 때 모친을 여읜 민기 어머니로서는 자기가 거믄애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었고 막연한 불안감에 싸여 살다가 고향인 서해안에서 배와는 거리가 먼 송전면에 시집 와 민기의 아버지와 가정을 꾸렸다.

이런 막연한 불안이 남편과 큰아들이 물과 관련해 죽자 병으로 나타난 것이다.
민기의 아버지는 민기가 중학교 3학년 때 친목계원들과 물놀이를 갔다가 보트가 뒤집히는 바람에 윤식 아버지와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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