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양, 중학교 30회 졸업생 앨범 좀 찾아와요."
문중훈은 벨 소리를 듣고 들어온 비서에게 지시했다.
명색이 앨범이지, 학교 전경 사진 한 장, 스무 명도 안되는 교사들 사진과 두 학급의 단체 사진 한 장씩, 그리고 졸업생의 사진이 빽빽이 들어간 10쪽 짜리의 빛바랜 사진첩을 비서가 가져왔다.
"우리 정아와도 같은 반이었군. 여기 송인숙 양과 박민기 군이 있네요. 나도 젊어서는 꽤 미남이었지요? 여학생들에게 인기도 좋았지요."
문중훈이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말했다.
민기는 문중훈의 '우리 정아'란 표현이 어색하게 들렸다.
"정아도 지금 수업 시간이 아니라면 불러서 함께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아, 아마 지금 수업 들어갔을 거예요."
민기가 제의하자 문중훈이 얼른 대답했다. '우리 정아'라고 의도적으로 부르면서도 오정아가 그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다.
"제가 이 앨범을 드릴 테니 음, 박 군이 수고를 해 주세요. 가까이 사는 사람이 있는가 알아봐서, 함께 모여 회포도 풀고 취재에도 협조해 드리고..."
<여성시대>는 한 달에 두 번 나오는 여성지로, 매달 화제의 여성을 찾아 특집 기사를 꾸민다고 했다. 이번 호에는 지난달에 남편과 함께 성황리에 공연을 마친 송인숙을 인터뷰하기로 하였다. 기획명은 "이 사람의 스승 ". 성장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을 만나 그 시절을 회고하는 것이 주된 내용으로, 스승과 나누는 대화는 물론 당시에 함께 수학했던 친구들을 한자리에 모아 친구로서의 송인숙을 이야기하게끔 한다는 것이었다.
민기는 유 기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송인숙이 송전 학교에 재학할 때 민기는 송인숙이 피아노 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 피아노가 생긴 것은 오정아가 전학 오고 한두 달 뒤였고, 민기네 교실 옆에 있던 실습실이 그때 음악실로 바뀌었다.
피아노는 오히려 오정아가 더 잘 쳤다. 오르간에 솜씨가 있어 조회 때면 애국가와 교가 반주를 하던 송인숙은 피아노가 들어오면서부터 시세를 잃은 오르간과 함께 뒤켠으로 물러났다. 대신 오정아가 전주까지 넣어가며 피아노로 멋지게 애국가 반주를 해주었다.
"오늘은 제가 한 턱 내지요. 저도 참석했으면 좋겠는데 마침 읍내에서 군수와 만찬을 하기로 돼 있어서... 대신 우리 정아를 참석시킬 터이니 함께 즐겁게 지내세요."
문중훈은 다시 탁자 밑의 벨을 눌렀다.
"이봐, 홍 양. 우리 면에서 제일 큰 음식점이 어디지? 그리로 전화해서 내 이름대고 예약해 둬. 귀한 손님들 가신다고, 특별히 신경 써서 잘 모시라고. 그리고 근사한 술집 있으면, 그래, 거기가 좋겠군. 솔밭 카페에도 예약해 두고. 계산은 내가 나중에 다 할 거라고."
문중훈은 시골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예약이란 말을 두 번씩이나 썼다.
시골길을 걷고 싶다는 정 기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일행은 자동차를 학교 운동장 한 켠에 세워 두고 교장 비서가 일러준 밥집으로 걸어갔다. 예약이고 뭐고 할 것이 없는 조그만 밥집이었다. 미리 전화를 해두어서인지 주인은 방 하나를 깨끗이 치워 두고 상을 차려놓고 있었다. 곧 양념된 불고기가 들어왔다.
저녁 식사하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지만 다들 식욕이 당기는지 부지런히 먹었다.
"너무 배부르게 먹으면 술맛 없어지니 허기를 면할 정도로만 먹읍시다."
대화는 정 기자가 항시 이끌어 갔다.
밥을 한 공기 먹은 민기가 잠깐 서에 들렀다가 오겠다고 일어서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일어섰다. '솔밭'에 가 있을 테니 그리로 오라는 것이었다.
민기가 지서에 들러 간단히 보고를 하고 약속 장소인 솔밭 카페로 가보니 오정아도 와 있었다. 그들 네 사람 사이에서 요즘 유행하는 대로 앞머리는 길고 귀와 목 위의 머리는 군대식으로 바싹 치켜 자른 청년이 맥주 병 마개를 따고는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주머니에 넣은 왼팔이 허전해 보였다. 외팔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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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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