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분들만 다 모이셔도 좋겠군요. 저희가 교장 사택에서 묵기로 했으니 내일 서로 연락이 되시는 대로 교장 선생님 댁으로 전화를 주십시오."
어느새 그들 앞에는 빈 맥주병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선영혜는 때 아닌 독감에 걸려 일찍 들어가 쉬어야겠다며 내실로 들어갔다.
맥주 세 잔을 마실 때부터 유난히 취기를 빨리 느낀 민기는 취한 김에 인사불성이 되도록 더 마셨다. 일행이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해대며 정신없이 떠들 때쯤에야 송인숙은 겨우 첫잔으로 받은 맥주 한잔을 비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송인숙의 볼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갰다.
몸을 겨우 가눌 정도로 만취한 민기는 송전리에서 송암리까지 5리가 넘는 길을 혼자 어흥 어흥 울면서 걸어갔다. 취한 민기의 눈에 하얀 교복을 입은 작고 오동통한 여학생, 송인숙의 모습이 그렁그렁 맺혔다.
(7) 운명의 인터뷰
다음 날 오전 11시에 전날 거명됐던 사람이 모두 문중훈 교장의 집무실에 모였다. 문중훈과 오정아, 원종일, 최순임, 박민기가 주인공인 송인숙을 가운데로 하고 둘러앉았다.
유승수 기자는 중앙 테이블에 소형 녹음기를 놓고는 정선영 기자의 카메라에 찍히지 않을 위치에 서서 이러저러하게 대화를 이끌어 달라고 주문하였다. 그 사이에 정선영 기자는 계속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우선, 문 선생님을 오랜만에 뵌 것으로 하고 인사부터 하시지요."
유 기자가 요구했다.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름살이 한두 개 생기시고 새치가 많이 눈에 띄긴 하지만 옛 모습 그대로이시네요, 이런 식으로요?"
연극 대사 외우듯 인사말을 하던 송인숙이 계면쩍은 듯이 유 기자 쪽을 바라보았다.
"잘 하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시면 됩니다."
"아, 송인숙 양, 반가워요. 몰라보게 변했는데요. 저번 공연에 가 보진 못했지만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평을 보고 참 기뻤어요. 같이 공연하신 부군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문중훈이 능숙하게 송인숙의 인사를 받았다.
"이번에는 피아노를 전공하게 된 동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유 기자의 주문이었다.
"문 선생님이 제게 큰 동기를 주셨지요. 중학 3학년 때... "
"송인숙 양은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어요."
송인숙의 말을 문중훈이 가로챘다.
"그러나 자신의 재질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런 인숙 양을 제가 음악 특별 활동반에 들게 해서 오르간을 가르쳤지요. 그때 우리 학교엔 피아노가 없었거든요. 그 후 학교에 피아노가 들어왔을 때 인숙 양이 기뻐하던 얼굴이 눈에 선해요. 저는 토요일 오후면 음악실 열쇠를 인숙 양에게 건네주고 마음껏 피아노를 칠 수 있게 해 주었어요. 그러나 인숙 양이 곧 전학을 가서 피아노를 제대로 가르쳐 주진 못했어요. 그것이 몹시 안타까워요."
처음 문중훈이 말을 가로챌 때는 무언가 할 말을 다 못한 듯했던 송인숙의 얼굴이 문중훈의 말이 길어지자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저는 인숙 양이 전학할 때 인숙 양 부모님께 부탁을 드렸지요. 인숙 양에게는 특출한 음악적 재능이 있으니 부모님께서 그 재능을 꼭 키워 주십사구요. 아마, 이런 저의 간청이 받아들여져서 인숙 양이 독일까지 유학을 하게 됐을 거예요. 피아노를 직접 가르치진 못했어도, 어렸을 적에 그 음악적 재질을 발견하고 본인에게 자신감을 심어 준 것도 선생으로서 큰 역할을 해 낸 것이라고 늘 자부하고 있지요."
문중훈의 말만 들어서는 그가 아니었으면 송인숙의 오늘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민기가 들어서도 역겨울 정도인 문중훈의 자화자찬에 송인숙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얼굴로 앉아 있었다. 피아노 때문에 벌까지 섰던 일을 까맣게 잊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송전 학교에 들여온 그 피아노도 실은 이사장이 자기 딸 오정아를 염두에 두고 배려해 준 것이었다. 덕분에 음악실까지 생기자 음악 선생인 문중훈의 얼굴은 노상 싱글벙글이었다. 그는 방과 후 청소 시간이 되면 오정아를 음악실로 호출했다. 오정아에게 반주를 시키고 자기는 가곡을 불렀다. 그리고는 청소가 끝나고 교실이 다 정리가 된 다음에야 오정아와 함께 들어와 종례를 하고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이들은 청소 시간이면 불평을 터뜨렸다. 우리는 매일 힘들게 청소하는데 정아는 그 시간에 피아노만 치게 하니 선생님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불만이 한참 뒤에야 문 선생에게 전해졌다.
어느 날 종례 시간에 문 선생은 엽서 만한 하얀 쪽지를 반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선생님에 대한 불만이나, 급우 사이의 문제 같은 게 있으면 무기명으로 써서 내라고 하였다. 누가 어떤 내용을 쓰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니 마음 놓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며 자기는 학생들의 건의 사항을 최대한 받아들일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잠시 후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아이들의 건의, 불만이 적힌 쪽지들을 읽어가던 문 선생의 얼굴이 한 쪽지를 집어들어 반쯤 읽더니 파랗게 변했다. 다 읽고 난 그는 주먹으로 교탁을 탁 내리치고는 고함을 질렀다.
"이것 쓴 사람 누구야?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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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