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여선생의 죽음

그 날 밤 민기는 밤새 뒤척이다가 지서 숙직실 창문이 훤하게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곤한 잠에 빠졌던 민기는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리는 비상 전화벨 소리에 소스라쳐 일어났다.

잠깐 눈만 붙였다 뜬 것 같은데 벌써 일곱 시였다.
"저, 저, 사람이, 사람이 죽었어요."

전화기 속에서 중년 여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십니까? 거기 어디십니까?"
"이사장 저택, 송전 학교 이사장 사택이에요."
민기는 전화벨 소리에도 미동도 않고 코를 골며 자는 강 순경을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지서장 집에 전화로 보고하고는 오토바이에 올랐다.

이사장 사택은 겉보기와는 달리 안은 신식으로 돼 있었다. 최근에 개조한 것 같았다. 아파트 같이 현관문만 닫으면 실내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게 돼 있었다.
"어제 저녁에 집에 갔다가 조금 전에 돌아와 보니 글쎄 오 선생님이..."
민기는 아직도 잠이 덜 깨 어리둥절해하는 강 순경을 이끌고 그 집 가정부가 가리키는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 침대에는 오정아가 오른팔을 옆으로 뻗어 높이 1미터 가량의 커다란 장식품 위에 얹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 장식품은 포도 넝쿨과 열매로 장식된 대 위에 커다란 수반이 얹혀 있고, 수반 위에는 오줌싸개 소년이 서 있는 마블 조각품이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확 풍겨 나오는 피 비린내가 아니면 오정아가 그냥 잠을 자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오정아의 얼굴은 희다 못해 푸른 기가 돌았고 시뻘건 핏물이 가득 고인 장식품의 수반에 오른쪽 손목이 잠겨 있었다. 그 손목은 오줌싸개 소년의 다리에 끈으로 묶여 있었다. 수반의 물이 회전해서 나오는지 천진한 얼굴의 오줌싸개 소년은 계속 피오줌을 싸고 있었다. 수반 가장자리에는 피 묻은 면도칼이 놓여 있었다.
민기는 오정아의 얼굴에 손을 대 보았다. 섬뜩하리만큼 차가웠다. 초보자가 보기에도 다량 출혈로 인한 사망이었다.

"아주머니, 집 안에 있는 물건에 손대지 않았지요?"
"예, 저는 전화만 걸고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어요. 죽었지요? 죽은 게 맞지요?"
"예, 죽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알리셨나요?"
"예, 지서에 신고한 뒤에 바로 서울에 계신 이사장님께 전화 드렸어요. 오 박사님께도 전화하구요."

가정부의 이빨 맞부딪치는 소리가 다닥다닥 났다.
"누가 죽었다고?"
지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는 권태인 지서장이 벌써 복장까지 제대로 갖추어 입고 나타났다.

간단하게 민기의 보고를 들은 지서장은 잠자코 오정아의 방 안을 살펴보더니 팔짱을 끼고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흐음, 자살이구만."
지서장은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으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꽂고 있는 세 사람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누가 침입한 흔적도 없고, 없어진 물건도 없고, 집 안이 흐트러지지도 않았고... 탁자 위의 이 술병, 그리고 이 약."

지서장이 앉아 있는 소파 앞 탁자에는 빈 맥주병 다섯 개와 유리잔 하나, 약병이 한 개 놓여 있었다. 아직 약이 반도 넘게 남아 있는 약병의 겉에 '독시라민 석시네이트(Doxylamine Succinate)'란 상표가 붙어 있었다. 수면제였다.

"수반에 손목이 잠길 만큼 물을 채워 침대 옆에 갖다 놓는다. 그런 다음 가장 좋아하는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정성들여 화장을 한다."
지서장이 눈앞의 광경을 보듯이 천천히 말했다.

실제 오정아는 화장을 곱게 하고 창백한 입술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자고 있는 듯 누워 있는 얼굴이 평화로워 보였다. 생기발랄함은 없었으나 얼굴 전체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보였다. 평소의 오정아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던 고요, 적막이 느껴졌다.
오정아가 입고 있는 옷은 초록 바탕에 하얗고 파란 들꽃이 수없이 무늬져 있는 부드러운 질감의 원피스였다. 실크인 듯한 그 옷은 살이 조금 올라 있어 관능적으로 보이는 오정아의 몸매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 주었다.

"그 다음 거실로 나와 혼자 외롭게 앉아 술을 마신다. 술이 어지간히 오르자 미리 준비한 수면제를 먹는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 면도칼로 손목의 동맥을 자른다. 피가 저절로 지혈되지 않도록 상처 난 손목을 수반의 물에 담근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혹시 몸을 움직여 손목이 물 밖으로 나올까 봐 나머지 한 손과 이빨을 이용하여 수반에 고정되도록 끈으로 묶는다. 잠이 온다. 몸에서 피가 서서히 빠져 나가므로 별 고통이 없다. 오히려 황홀감까지 느껴지는 기분 좋은 잠이 몰려온다. 잠과 함께 죽음이 온다."

"지서장님, 추리가 대단하십니다. 눈으로 보는 것 같은데요."
강 순경이 맞장구를 쳤다.

[연재-여류 추리작가 '권경희'의 추리퀴즈-당신의 추리력은?] 저린 손 끝 [5]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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