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임채숙이 돈을 싸가지고 있던 종이 중에 ‘노량 기업’이란 글씨가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가지고 다니던 수사 자료 속에서 그 종이를 찾아냈다. 그리고 노량 기업에 대해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노량기업이란 이름을 가진 회사는 전국에 약 마흔 개 정도가 있었다. 유사한 이름까지 하면 훨씬 많았다.

곽 경감은 우선 서울에 있는 노량 기업만을 챙겨 보았다. 노량기업 주식회사라는 법인체 기업은 단 하나뿐이었다. 곽 경감은 우선 그곳을 찾아 가보았다. 이름과는 달리 그 회사는 서울의 북쪽 끝인 창동에 있었다.

부엌 칼 같은 주방 기구를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였다. 원래는 노량진에서 조그만 대장간을 하던 회사인데 규모가 커져 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노량진 재장간인데 간판 가게서 노량을 노랑으로 잘 못 만들어 주는 바람에 노랑 대장간이 되었다고 했다. 아무리 연고를 맞춰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민독추 일당과는 연관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처음 지목했던 회사 조사에 실패한 곽 경감은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이 현금을 싼 종이는 그 회사와 직접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물건을 거래하는 회사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곽 경감은 그 문제의 종이를 강 형사에게 주어 국립과학 수사연구소에 의뢰해 거기에 묻은 모든 성분을 조사해 달라고 했다.

곽 경감의 생각은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 종이에서는 섬유성분이 있는 물질이 다량 검출되었다는 통보였다.
“그렇다면 이 종이는 옷감이나 실타래 같은 것을 포장하는데 사용한 것이 틀림없어요.”
조준철의 의견이었다.

“맞아. 섬유 원료나 봉제품 같은 것을 포장하는데 쓴 종이인지도 몰라. 그렇다면...”
곽 경감은 ‘노량 기업’중에 섬유와 관계있는 회사를 찾아보았다. 노량진에 있는 ‘노량 물산’의 계열회사에 원단을 취급하는 회사가 있다는 것을 가까스로 알아냈다.
그는 노량 물산으로 찾아갔다.

55. 다섯 여자를 한 줄로

“나는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원단에 대해 좀 상의 할 일이 있는데요...”
그는 신대령이 만들어 준 가짜 명함을 적절히 써먹었다.
“우리 계열사 중에 원단을 만드는 회사가 있긴 있습니다만 워낙 규모가 작아서...”
무역 담당 이사라는 젊은 사람이 별로 달갑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 그 회사가 어디 있는지 제가 직접 찾아가서 담당자를 한번 만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곽 경감은 다시 부평 공단에 있는 노량기업을 찾아갔다. 마침 퇴근 준비를 하던 공장장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아, 그룹 박 이사한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워낙 규모가 작아놔서...”
늙수그레한 공장장은 꽤 친절했다.

“수출을 해본 경험은 전혀 없나요? 그럼 내수만 하셨다는 말씀이군요.”
“내수도 별로 신통치 않아서...”
“서울 시내에도 거래하는 곳이 더러 있지요?”
곽 경감은 점점 핵심적인 것에 질문을 접근시켰다.

“예, 주로 구로동 봉제 공장에 물품을 대고 있습니다. 근데 요즘은 망해버린 공장이 많아 그도 시원치 않습니다.”
“망해요?”
“최근 들어 우리나라 봉제품이 중국이나 동남아 등에 밀려 거의 수출 길이 막혀버렸답니다.”

“노랑에서 거래하다 망한 집은 몇이나 됩니까?”
공장장은 별 것을 다 묻는다는 듯이 곽 경감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대답했다.
“구로동에 만도 세 곳이나 있습니다. 미성, 대진, 남서울이 그렇죠.”
“미성, 대진, 남서울이라... 그럼 그 공장들은 지금 모두 무엇을 합니까?”
“그야 알 수 없죠. 딴 회사로 넘어 갔거나 문 걸어 잠그고 비워 두었거나...”
곽 경감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다. 만약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도록 비워 두었다면 그 곳이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몰래 숨겨 놓기는 안성맞춤이 아닌가.
“근데 손님도 그 빈 공장을 하나 빌리거나 사실 생각인가요?”
공장장이 곽 경감을 보고 내심을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또 들리지요.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곽 경감은 급히 인사를 하고는 그 공장을 나왔다. 이제 구로동에 가서 그 세 공장을 뒤져보면 분명 무슨 단서가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어쩌면 그 셋 중 한 공장에 20명의 국무위원 사모님들이 수용되어 있을지 모른다.

곽 경감은 혼자 구로동 단지로 가 볼까 하다가 조준철의 자취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구로동 공장은 매일이다시피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기 때문에 정보 형사들이 깔려 있었다. 수배되어 있는 자신이 섣불리 그 곳에 다니다가 붙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곽 경감은 조준철과 함께 긴장한 얼굴로 구로동 공단에 들어갔다.
민독추에서 두 사람의 국무위원 부인을 한꺼번에 희생시키겠다는 통지를 한 지도 이틀이 지났다. 그들이 말하는 시한이 서너 시간 남았을 무렵 총리한테는 중요한 보고가 들어왔다.
백장군으로 알려진 백성규 대령의 소재지를 파악했다는 것이었다. 그를 목격했다는 육군 정보부대 요원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시흥에 있는 어느 조그만 연립주택에 있다는 것이었다.

“신중히 포위망을 좁혀 이번에는 꼭 잡아야 한다.”
총리도 흥분해서 직접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합동 수사본부는 갑자기 활기를 띠고 체포 작전에 들어갔다. 중요 지휘관은 군 고급 장교들이었기 때문에 육군이 검거 부대의 주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백성규가 아무리 군인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민간인 신분인데 왜 군인들이 검거에 앞장을 서야 합니까? 저들이 서툰 짓을 해서 다 잡은 쥐를 놓치게 됩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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