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일이 그렇게 곽 경감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신 대령이 곽 경감있는 사무실로 들어왔다.
“곽 경감. 아니 여기서 무얼 우물쭈물 하고 있는 거요? 빨리 여기서 나가요. 어디 남해안 같은 데 가서 바람이나 한 달쯤 쐬고 와요.”
신 대령이 몹시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곽 경감이 돈 다발을 도로 신 대령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신 대령 얼굴이 크게 찌푸려졌다.

“전광대는 벌써 미국으로 출국했단 말입니다. 여기서 어물어물 하다가 구속이라도 된다면 모든 죄를 혼자서 뒤집어 써야 하는 거야. 여학생을 발가벗겨 놓고 아랫도리에 온갖 못된 짓을 다 하는데 그 자리에 경찰관이 함께 있었다면 공범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괜히 덮어쓰지 말고 빨리 내 말대로 해요.”
신 대령의 말은 다분히 협박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더욱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곽 경감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아요. 이건 당신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야.”
곽 경감은 영락없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우선 신대령이 마련해준 부산 오륙도 호텔에 내려가 하루 동안 숨어 있었다. 어느새 만들었는지 무역회사 중역 신분증에 엄청나게 많은 현찰까지 가지고 있었다. 

곽 경감은 엉겁결에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으나 도저히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괴로운 하루를 보냈다. 바닷가에 잠시 나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했다. 집에서 텔레비전과 신문 뉴스를 보고 놀랄 아내와 나미를 생각하니 더욱 괴로웠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잠옷 차림으로 누워있던 곽경감은 긴장하고 일어났다.“누구세요?”
“서울 신 대령님 심부름 왔어요.”
“신대령?”

곽 경감이 문을 열자 늘씬하게 보이는 아가씨가 무엇인가를 들고 들어왔다.
“주무시기 전애 오려고 서둘렀어요.”

여자는 배시시 웃으며 우선 입고 있던 옷을 순식간에 홀랑 벗어버렸다.
가는 허리와 하양 허벅지 그 사이의 까만 숲이 눈을 찔렀다.
“뭐, 뭐요? 외 이러는데...”
너무나 놀란 곽 경감이 말도 제대로 못했다.

“아이, 아시면서... 오늘밤 제가 외롭지 않게 해 드릴게요. 신대령이 신신 당부 했어요.”
아가씨는 곽 대령 허리를 날쌔게 껴안더니 다짜고짜 사타구니에 손을 넣고 거시기를 왈칵 쥐었다.
“왜, 왜 이래요.. 저어..저어...”

곽 경감이 평생 처음 당하는 일이라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아가씨 손아귀에 잡힌 거시기는 염치없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중지!”
곽 경감은 더 이상 참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그날 밤 아가씨를 돌려보내느라 진땀을 뺐다.

소동을 치른 뒤 곽 경감은 정말 텔레비전에서 처음으로 자기 얼굴과 함께 자신에 관한 뉴스를 듣고 괴로웠다.
9시 뉴스 맨 마지막에 정부는 성고문 사건 관련자로 전광대와 추병태를 전국에 지명 수배 했다는 뉴스를 간단히 했다.

화면에 나온 자기의 사진은 20여 년 전 경찰관 초년 시절의 흑백 사진이라 곽 경감인지 아닌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것 같기는 했다.
곽 경감은 호텔 로비에 내려와 집에 공중전화를 걸었다.
“당신이오? 당신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이 정말 그...”
아내가 놀라 눈물 섞인 말로 물었다.

“그게 아니야. 나를 믿어요. 일이 잘못되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곧 해결될 테니까 걱정 말고 있어요. 난 지금 부산에 있는데... 나미는 별일 없어요?”
“예. 나미는 아무 것도 몰라요. 당신 정말 괜찮은 거죠?”
“염려 말라니까. 그럼 다시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난 곽 경감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민독추라는 단체가 왜 기를 쓰고 이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룻밤을 지낸 곽 경감은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민독추의 본거지를 알아내고 임채숙이라는 여학생도 찾아내야 자기의 결백이 드러날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우선 서울로 올라가 백성규 대령을 찾아내 국무위원 부인들이 연금되어 있는 곳을 알아내면 모두가 풀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전과는 전혀 다른 조건 아래 놓여 있었다. 지금은 신분을 위장한 채 형식적으로는 쫓겨 다니면서 수사를 해야 하는 턱없이 불리한 입장에 있는 것이다.
곽 경감은 기차로 서울에 올라간 뒤 우선 조준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어린이 대공원 주차장에서 만났다.

“아저씨 어떻게 된 거예요? 정말 여학생 고문을 한 것은 아니지요?”
조준철이 초췌해진 경감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준철 씨는 그 말을 믿지는 않았겠지?”
“뭔가 잘못 된 줄 알았습니다. 권력을 쥔 자들은 온갖 파렴치한 짓을 다 하니까요.”
“나 부탁이 좀 있는데...”
곽 경감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 당분간 준철 씨 자취방에 좀 가서 있어야 되겠는데...”
곽 경감이 불 켜이지 않는 고물 지포라이터를 철거덕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해요. 어차피 둘이서 풀어야 할 일도 있고 하니까 차라리 잘 되었지요.”
조준철이 풀어야 할 일이란 것은 조은하 피살 사건의 범인을 찾는 일을 말한다는 것을 곽 경감은 잘 알고 있었다.

간단한 짐을 챙겨들고 곽 경감은 조준철의 집에 기거하면서 우선 사모님들이 연금되어 있는 것을 찾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조준철과 옛날의 심복이었던 시경 강력계 강 형사의 은밀한 도움을 받기로 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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