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 중에 7시께 집에 들어가 볼까 하는 구절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7시에 아파트에서 만나자는 뜻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방수진은 자기의 경솔했던 전화질이 후회스러웠다.
수진은 일찍 화랑 문을 닫고 아파트로 갔다. 3층에서는 여전히 아무 기척이 없었다.
수진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옷을 벗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아랫배가 약간 도톰하기는 했으나 아직 곡선이 끊어지지 않고 잘 보존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진은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촉촉하게 젖은 피부에 향수를 살짝 뿌렸다. 그리고 침대 위에 누워 거울을 보았다. 화려한 잠옷이 석양빛을 받아 더 화려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뇌리에 남아있는 불안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얼마를 지났을까. 정채명이 돌아 왔다. 그는 방수진을 가볍게 안고 뺨에 입을 맞춘 뒤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

“미안해요. 함부로 전화를 해서...”
방수진이 그의 가슴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정채명은 그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방수진을 방바닥에 밀어 눕히고는 거칠게 그녀의 잠옷을 헤쳤다.

인질이 되어 있는 국무위원 부인 중에는 벌써 두 명이 희생되었다. 첫 번째는 국도에서 교통  사고로 희생되고 두 번째는 한강에 투신자살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보면 모두 사고이지 살해한 것으로는 일단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세 번째 희생자는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 더구나 이번에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희생시키겠다고 예고하고 있지 않는가?

국무회의에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우선 대국민 사과 성명을 내고 임채숙의 고문 사실을 인정한 뒤 그 관계자를 문책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 정도 일 가지고 정권을 내놓아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우선 시간을 벌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총리 이름으로 사과 성명을 내고...”

늘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정일만 국방 장관의 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시오. 강도들한테 사과를 한단 말이오!”
박인덕 장관이 소리를 쳤다.
 
54. 여자 손에 잡힌 보물은...

“흥. 내 와이프는 이미 죽었는데 자기들 마누라는 살리고 싶다 이 말씀들이군. 잘 해봐요. 잘해봐!”
박상천 해군 장관이 주정하듯이 중얼거렸다.
“이 문제는 내가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 맡겨 주십시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총리가 결론을 내렸다. 김교중 총리가 대통령을 독대하고 난 뒤에 내려온 결정은 뜻밖이었다. 지금까지 이 정권이 취하고 있던 강경 일변도의 정책에서 크게 선회를 한 느낌이었다.

“대국민 사과 성명을 내고 성고문 관계자를 엄중 문책하라는 지시입니다.”
비대위에서 국무위원들에게 말하는 김교중 총리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그날 오후 2시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 성명을 냈다.

- 반정부 단체 가담 혐의로 연행된 여학생 용의자를 경찰 수사관들이 가혹 행위를 한 사건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일부 수사관의 자질 부족으로 일어난 이러한 사건은 앞으로 재발하지 않도록 철저한 대책을 세우겠다. 따라서 이번 사건의 책임을 물어 치안본부장을 해임하고 가혹행위 현장에 있었던 두 사람. 전광대와 곽영도는 즉각 사법처리 하겠다.
이것이 대통령 담화문의 요지였다.

“뭐가 어쩌구 어째요? 왜 그 일이 치안본부에서만 책임을 져야 합니까? 더구나 전광대는 경찰관이 아니라 군인 신분이란 말입니다. 군바리들이 저지른 일을 왜 우리 경찰이 책임져야 합니까? 더구나 그들은 합동 수사본부 제4부 소속입니다. 제4부의 책임자는 신동훈 대령 아닙니까? 군부의 똥바가지를 왜 우리가 뒤집어쓴단 말입니까?”
서종서 차관이 정채명 장관을 향해 입에 거품을 물고 불평을 했다.

“나도 총리에게 항의를 했소. 그리고 대통령을 만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래 총리는 무엇이라고 변명합니까?”
“이 비상시국에 군부를 건드려 놓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군부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내무부와 치안 본부에서 가슴을 치며 분통을 터뜨리는 동안 직접 불똥이
떨어진 것은 곽 경감과 전광대였다. 전광대는 정작 당사자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말리려고 하던 곽 경감은 가해자가 되어버렸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가만 앉아 당할 수만은 없었다.

대통령의 성명이 발표되고 있는 동안 곽 경감은 신동훈 제4부장에게 불려갔다.
“곽 경감 당분간 몸을 좀 피해 있는 것이 좋겠소. 물론 누가 악착 같이 잡으러 다니지는 않겠지만... 짜고 하는 일이라도 숨바꼭질을 좀 해야 하게 생겼으니... 연락은 나한테 전화로만 하십시오. 누가 소재 추적을 하지는 않을 테니 전화는 안심하고 해도 됩니다.”
“예?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곽 경감은 처음에는 정말 영문을 몰랐다.

“임채숙 고문 건이 좀 복잡하게 되었소. 나중에 대통령 담화문을 좀 보고... 자 이건 당분간 쓸 돈이오.”
곽 경감은 신 대령이 주는 현찰 한 다발을 들고 나왔다. 몇 시간이 지난 뒤에야 곽 경감은 자기가 수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더구나 여학생에게 성고문을 가한 못된 고문 경찰로 낙인 찍혀 체포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곽 경감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경찰관 생활 25년에 못된 짓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한 일이 없는 곽 경감이다. 더구나 이번 일만 해도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범죄자의 낙인이 찍혔으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곽 경감은 신 대령의 말대로 도망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법처리를 한다면 당당히 법정에 서서 결백을 밝히겠다는 생각이었다. 곽 경감은 합동 수사 본부 사무실에 태연히 앉아 있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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