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실수다.
“케이스를 가지고 제조회사를 추적중이니까 혹시 성과가 있을는지도 모르지.”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였다. 그중에 다섯 모금 이상 피운 담배는 하나도 었는데도.

“검시 결과가 나왔어. 사인은 청산가리 중독이야. 사망 측정시간은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 3시까지는 생존이 확인됐고 사체 발견은 4시니까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거지.”
강 형사의 눈에서 반짝 빛이 났다.

“그렇다면 살인이 틀림없군요. 청산가리를 마실 만한 아무런 용기(用器)가 없었으니.”
“물론 유류품은 발견된 바가 없지. 그리고 청산가리 정도의 맹독을 마시고 치울 수도 없었을 거지만 문제가 또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은 것 같아.”

추 경감은 머릴 흔들며 담배를 비벼 껐다. 한 갑을 몽땅 피워 버렸다.
강 형사는 재빨리 자기 담배를 꺼내 추 경감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우이. 문제는 입 안이나 식도에 청산가리를 마신 흔적이 없단 말야. 그 맹독은 위에서부터 퍼져 나가기 시작했단 말이야.”

“그거야 뭐, 캡슐에 싸서 먹었거나 주사기로 위에 찔러 넣었거나......”
“배에서는 주사기의 흔적 같은 걸 찾을 수가 없었단 말야.”
“그렇다면 청산가리를 캡슐에 넣어 먹었던 걸까요?”

“그렇다고 가정을 해보지. 캡슐이라면 물이 없어도 먹을 수도 있고, 또 먹고서도 잠시 움직일 수 있으니까 화장실이나 식당이나 뭐 그런 데서 먹고서는 다시 방으로 돌아온다는 가정도 성립되지.”

“휴우, 그렇다면 역시 자살인 모양이군요.”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어. 동기가 명확하지 않은 거지. 거기다가 자살하는 사람의 상식을 모두 뛰어넘고 있단 말야. 자살을 하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은 우선 혼자 있는 곳으로 가는거란 말야.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반추해 보고 유서를 쓰거나 하지. 음독 자살을 하는 사람치고 방문을 걸어 잠그지 않는 사람은 없어. 그런데 이번 사건은 어떠했나?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모여서 별장으로 내려가 비디오를 틀어 놓고 구경하면서 자살을 한다? 이건 상식적인 일이 아니야. 틀림없이 범죄가 개입되어 있는 거라고. 여기엔 어떤 함정이 마련되어 있는 거야. 김 박사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누군가가 캡슐을 먹였던 것은 아닐까요? 그때 모임에서 자리를 비웠던 사람이 누누구인지 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좋아. 그걸 확인해 보도록 하지.”
둘은 먼저 변 사장을 만나 보기로 했다.

변 사장은 방배동의 자택에 있다가 추 경감과 강 형사를 만났다.
육중한 철제 대문 위로 대리석으로 치장된 3층 양옥이 과연 사장집 같다는 인상을 주더니만 대문을 들어서자 아예 하나의 별천지가 펼쳐졌다.
5백 평은 족히 될 것 같은 넓은 정원에 예쁘장하게 다듬어진 관상수들이 심심 산골에나 있을 듯한 기암괴석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보도블록도 화강암과 대리석이고, 옆으로는 연못과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물이 깨끗해 관상용으로 기르는 듯싶은 살 오른 비단잉어들이 꼬리치는 양이 들여다보였다.
현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선 매우 못마땅하다는 듯이 추 경감과 강 형사를 노려보고 있는 세퍼드가 눈에 띄었다.

강 형사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바싹 긴장되어 걸음을 우뚝 멈춰 버렸다.
추 경감은 전혀 무심한 표정으로 송아지만한 개도, 멈춰 선 강 형사도 아랑곳하지 않고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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