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그렇지요. 하던 얘기를 조금만 더 계속하지요. 제가 생각할 때는 그렇습니다. 사람이라고 태어난 건 뭔가 남기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는 그런 거란 말이지요. 제가 이런 좀 큰 집에 산다고 어쩌면 못마땅한 생각으로 절 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도 사실은 그런 명예에 비하면 한낱 보잘것없는 졸부에 불과합니다.

가령 먼 후일, 사람들은 고작 이런 소리나 하지 않겠습니까? 야, 이 집은 20세기 후반의 어느 부자가 지었다더라. 하지만 묘숙이 같은 경우엔 다를 수도 있어요. 누가 압니까? 후일 과학 교과서에 김  묘숙은 배추당근이라는 유전자 합성에 성공하여 한국의 유전공학에 신기원을 이루었다라는 것이 실릴지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이젠 고인이 된 묘숙이를 위한 추모집으로 이 스크랩을 엮어서 출간할 생각을 말입니다.”

“좋은 뜻 같군요.”
강 형사는 그의 장광설에 지루해져서 화제를 바꿨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동감을 표시했다.
“허허허. 제 말이 좀 황당했던 모양이군요. 하긴 모두 바쁘실 테니까......뭘 물어 보고자 오셨습니까?”

“그날 별장에서 말입니다. 화투를 치다가 밖에 나갔다 온 사람이 있습니까?”
강 형사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뭐 수시로 들락거리지 않나요?”
“잘 생각해 보세요.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변 사장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음. 이이사가 한 10분 정도 나갔다 온 것 같군요. 판이 한 댓판 돌았던 것 같아요.”
“예. 그랬군요. 어딜 다녀온다고 했던가요?”
강 형사는 드디어 단서를 발견했다는 감정을 전혀 감추지 않고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어요.”

“설마 그날 이 이사님이 배탈이 났다던가, 뭐 그런 건 아니었지요?”
“예. 물론 그런 얘긴 못 들었습니다. 하지만 화장실이야 누구나 가는 것 아닙니까. 하긴 시간이 좀 너무 걸린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리고 김 박사님이 장 이사님을 좋아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서 아신 거지요?”
강형 사의 질문에 변 사장은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꼭 대답이 필요한 건가요?”

“예. 고인에 대한 비밀은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음......사실은 편지를 보았습니다. 부치지 않았던 것인데, 묘숙이는 얌전한 성품이라 종이 같은 것도 꾸깃꾸깃 해서 던지지 않고 예쁘게 접어서 버립니다. 사무실에서 휴지통에 삐죽 나온 게 괜히 신경이 쓰여 읽어 보았는데 그런 이야기가 적혀 있었던 겁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였나요?”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의 이야기였어요. 장 이사를 좋아하는데 장 이사는 나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게 골자이고, 나머지는 뭐 흔히 그런 연애편지에 나오는 내용이었어요.”

변 사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둘은 더 묻지 않고 거기서 나와 장주석과 김묘숙이 만난 참치전문 일식집 미향으로 갔다.
“만일 이 사건이 타살이라면 범인은 분명 이 술균이에요. 이 술균은 경리담당 이사니까 거액의 회사 공금을 빼돌리고 그걸 김 묘숙이 알았던거라고요.”
강 형사는 변사장 집에서부터의 흥분을 유지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왜 자네는 소설가가 되지 않았지?”
추 경감은 강 형사의 논리가 비약할 때 흔히 이런 말로 강 형사를 침묵하게
했다.

일식집의 웨이터들은 모두 장 주석과 김 묘숙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둘은 서로, 혹은 다른 사람과라도 거의 매일 여기서 점심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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