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때 총 사퇴하리라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요?”
정일만 장관이 팔짱을 낀 채 서서 말했다.

“어쨌든 그들에게서 백성규나 사모님들의 감금 위치를 알아내야 해. 그런 일은 경찰이나 군 수사 요원보다는 정보국 요원들이 훨씬 더 잘 할지도 몰라.”
정일만이 성유 국장을 보면서 말했다.
“그 일은 합동 수사본부의 판단에 맡겨 봅시다.”

성유 국장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민독추에서 시한을 정해온 72시간은 이제 스무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합동 수사본부의 내로라하는 수사관들은 끌려온 남녀에게서 모든 것을 털어 내기 위해 온갖 끔찍한 방법을 다 동원했다.

연립 주택에서 연행해 온 남자 세 명 중 나이 든 사람은 강북 대학 공과 대학의 전임 강사였다. 박인규라는 30대 후반의 그 사나이는 소위 운동권 교수였다. 미국에서 학위를 얻어 귀국한 그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는데 날카로운 시국 비판을 많이 해 학생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백성규가 어디 있는 지만 얘기하면 당신은 돌아 갈 수 있어. 박성규는 당신 같은 정부 비판이나 하는 얼빠진 지식인과는 달라. 당신 같은 사람들은 귀싸대기나 한대씩 갈겨 내 보내면 그만이지만 그자는 중대한 범죄자란 말이야.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당대의 정권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사람을 납치하고 협박하고 죽이는 일은 체제 비판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야. 이건 중대한 범죄 행위란 말이야. 그러니까 당신은 그런 범죄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 아니란 것쯤은 잘 알 것 아니야?”

정일만의 말대로 정보국에서 파견된 수사 요원들은 연행한 남녀를 잘 다루었다. 그러나 호락호락 넘어갈 사람들은 아니었다.

“백장군 일행이 범죄자라고 자꾸 말하는데 그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해요. 그뿐 아니라 죄를 짓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지금 당신들보다 더 죄를 짓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 또 있겠어요? 죄 없는 사람들을 불법적으로 데려다가 온갖 고문이나 하는 일은 죄가 아닌 가요?”

박인규는 그 창백한 얼굴이 더 창백해진 채 조금도 굽힐 것 같지가 않았다. 그와 함께 연행되어온 학생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백성규가 누군지 모른다고 딱 잡아떼었다. 거꾸로 매달고 발바닥을 두들겨 패고 머리를 욕조 물속에 처박아 넣기도 했다. 온갖 잔혹한 고문을 다 해 보았으나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아직 맛을 덜 봐서 그래. 이 새끼를 걸레로 만들어 쓰레기통에 갖다버려.”
박인규의 심문을 지켜보고 있던 반장급 수사관이 마침내 화를 벌컥 내며 군화 신은 발로 박인규의 턱을 힘껏 차버렸다. 박인규는 얼굴이 피 범벅이 되어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3호실로 끌고 가!”

피투성이가 된 채 겨우 일어서는 박인규를 보고 반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말하는 3호실이란 공포의 방이었다. 몽둥이질로부터 전기 고문에 이르기까지 온갖 못된 짓을 다 할 수 있는 지옥이었다. 원래 이 곳은 정보국에서 사상범을 다루기 위해 비밀리에 만들어 놓은 취조실이었는데 지금은 합동 수사본부의 일부로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3호실 고문 도구 중에 가장 잔인한 장치는 소위 지옥 엘리베이터라는 고문이었다.
철판으로 된 엘리베이터 같은 네모진 방에 발가벗겨 사람을 가둔 뒤 날카로운 못으로 가득찬 천장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앉는 장치였다. 그것은 마침내 사람을 내려 눌러 벌집을 만들어 죽일 것 같은 장치였다. 그 천장이 머리에까지 닿기 전에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심장 마비를 일으켜죽기도 했다.
                   
57. 두 손바닥으로 가리기엔 너무...

박인규가 3호실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동안 함께 연행 되어온 40여 명의 여자 근로자들은 그들대로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그들 중 20여 명은경찰서에서 소위 훈계 방면되고 열한 명만이 합동 수사본부로 넘겨졌었다.

합동 수사본부에서는 다시 네 명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돌려보냈다. 네 명 중 세 명은 수배되어 있는 대학생이었다. 그들은 민독련이나 남독련에서 반정부 데모를 주도 해온 여학생 조직의 일원으로 위장 취업을 한 채 노동조합 결성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온갖 기초적인(?) 고문을 다 당했으나 쉽게 불지는 않았다. 여자 피의자들을 데리고 왔을 때는 함께 수용하거나 심문하는 법이 없었다.
반드시 한 사람씩 분리해서 심문을 하기 때문에 그들은 들어올 때부터 누가 이곳에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백성규를 모른다고? 아직 맛을 덜 봤군. 이 곳이 어딘 줄 알아? 너희들이 말하는 인권을 떡으로 만드는 곳이야. 여기서 살아 나간 사람도 있긴 있지. 방법은 간단해. 그 간단한 방법을 모르고 모두 비명만 지르다가 병신이 되지. 자기가 어디에 갔다 왔는지 절대 기억하지 못하고 이곳을 나가게 되는 경우도 있지. 자 온전하게 걸어 나가겠어, 아니면 떡이 되겠어?”

네 명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대학 신입생 김명희가 먼저 불려 들어왔다.
“백성규가 어디 있지?”
“정말 몰라요. 난 아무 것도 모르고 데모하는 언니들 따라 다니다가 학교서 제적당하고 갈 곳이 없어 언니들 따라 취직하러 갔을 뿐이에요.”
김명희가 겁에 질려 그 큰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순순히 말하지 않겠다 이거지? 네가 남독련 서부 서울 여학생부 차장이라는 어마어마한 감투를 쓰고 있다는 것을 다 알아. 그리고 지독한 빨갱이 임채숙의 조직원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단 말이야. 우리 서로 힘들게 하지 말자.”­­­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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