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 금호강.'
'금호장.'
'금호 식당.'
여러 가지 상호를 적어 보았다. 이름만 써 보아도 가슴이 뛰었다.
은실이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이튿날 늦잠을 자고 있는데 종심이가 깨우러 왔다.
"얘, 은실아, 지금이 몇 신 줄 알아?"
은실은 그제야 벌떡 일어났다.
"농산 큰 언니가 찾으셔."
은실은 대강 얼굴을 매만지고 농산 권번장 방으로 갔다.
"고단했던 모양이구나. 어제 밤에 전갈이 왔는데, 헌병대 미야자끼 중위가 좀 만나자는데..."
"미야자끼 중위가요?"
은실은 뜻밖이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미야자끼 상과 무슨 일 있었냐?"
농산의 얼굴에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별 일은 아니고요... 성중석 도련님이 함께 만나자고 해서 셋이 만난 일이 있어요."
"살롱 킹구로 점심시간에 나오라는구나. 시간 늦지 않게 다녀와. 그리고 책 잡히는 일 없도록 몸가짐 조심해야 한다."
"예."
은실은 농산 권번장 방을 나오면서 몹시 궁금했다. 저녁 술자리도 아니고, 서슬이 시퍼런 일본 헌병 장교가 일개 기생을 대낮에 번화가의 양식집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은실은 수수하게 옷단장을 하고 박 영감을 시켜 인력거를 오게 했다.
무라가미 마찌에 있는 살롱 '킹구'에 닿을 때까지 은실의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혹시 중석씨가 함께?'
'머리 얹어 줄 테니 시간을 정하라고 하지나 않을까?'
은실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살롱으로 들어섰다.
"미야자끼상 만나러 오셨지요? 2층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검정 나비넥타이를 맨 웨이터가 친절하게 은실을 안내했다.
"오이, 온시루 상."
미야자끼는 은실을 보자 반갑다는 표시로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은실은 일부러 조선말로 인사를 하고 미야자끼의 반응을 보았다.
"안뇽하므니다. 하하하."
미야자끼는 서툴지만 조선말을 조금은 할 것 같았다.
"이런 좋은 식당에 저를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은실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맞은편에 얌전하게 앉았다.
"사꾸라이상 없는 데서 단 둘이 한번 만나고 싶었지요."
미야자끼는 우습지도 않은 일에 혼자 잘 웃었다.
"온시루씨 이름 좀 바꾸시지 않겠습니까?"
"예? 제이름을요?"
"온시루, 일본말 발음하기 어렵습니다. 아이꼬나 하나꼬 같은 이름 좋아요."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라서 함부로 바꿀 수가 없어요."
은실은 공손하게 거절했다.
"바꾼다기보다는 황국신민으로서 하나 더 가진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제가 감히 황국신민이 될 자격이나 있나요. 조선의 기생 주제에."
"조선 기생이 어때서요? 가을에 나올 담배 갑에도 조선 기생의 그림을 넣는대요. 하가끼(엽서)에도 치마저고리 입은 조선 기생 그림을 넣었어요."
미야자끼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본은 가냘파 보이는 조선 기생을 일본 본토에 홍보물로 쓰기 시작했다.
일본에만 있던 윤락 여성 사창가인 유곽을 공식 제도로 도입하였다. 대구의 원대에 '자갈마당'이라는 유곽이 일본인들의 제도에 따라 설치되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에 권번과 유곽을 권장하여 일본 남자들을 조선 반도로 유혹하는 수단으로 쓰기 시작했다. 조선 문화의 말살과 동시에 일본 관광객을 끌어들여 조선의 일본화를 촉진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일본의 공창제도(정부서 허락한 공공 사창가) 역사는 오래 되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일본의 인신매매 정부 관리 제도는 조선 침략으로 임진난을 일으킨 도요도미 히데요시(豊信秀吉) 시절 교토의 중심가 야나기죠(柳町)에 있는 공창인 요시와라가 대표적이다. 유흥가를 화류계라고 하는데 화류계의 화는 꽃화(花)니까 의미를 알겠는데 버들이라는 '류'자는 왜 쓰는가?
그것은 화류계라는 뜻의 원류가 야나기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기생은 명칭이 4백가지가 넘는다. 계급도 여러 계단이 있어 최고의 계급을 다이유(太夫)라고 불렀다. 그 밑으로 고시, 덴신 등의 계급이 있다.
일본의 몸파는 여자는 부엌데기로부터 비구니(여자 스님)에 이르기 까지 수백 종류가 있다. 성 문화가 극히 개방적이고 발전(?)한 일본은 성의 방식 기술도 세계 제일이다.
일본의 기생을 흔히 게이샤(藝者)라고 부르는데 이는 조선의 기생과는 조금 다르다. 전통 노래와 춤의 기술을 보유한 최고급 기생에 속하는 분류다.
일본의 기생은 천차만별이었다. 기생으로 불리는 웃음과 몸을 파는 여자를 나타내는 용어는 4백가지가 넘는다.
몸파는 여자의 대표적 이름은 '논다니'(遊女)이지만 그 외에도 매화, 새장속 새, 여우, 금고양이, 석가, 사자, 천신(天神), 붉은 옷의 여인, 하얀 귀신, 탕녀, 밤매 등이다. '하얀 귀신'은 얼굴에 흰 분가루를 심하게 바르기 때문이고 '밤매'는 밤에 유혹하는 매라는 뜻이다.
'밤매'는 주로 은퇴한 창녀들을 말한다. 늙어서 이제 유곽에서는 밥벌이를 할 수 없자 밤의 길거리에 나섰다.
돈이 없는 막노동꾼이나 하류 무사인 아시가루 등이었다. 아시가루는 사무라이 하류로 돈이 없어 일생 여자 맛을 보기 힘들다.
'밤매'는 장사 밑천인 돗자리 하나씩을 가지고 다닌다. 밤거리에서 성에 굶주린 남자를 만나면 골목길이나 공원, 빈집 같은데서 즉석 성교를 한다. 대개 10분이나 15분이다. 값도 싼데 이돈 마저 떼어먹고 일이 끝나면 바로 줄행랑을 치는 치사한 남자도 있다. 여자라서 옷을 추스르고 나서면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어 공짜가 되고 만다.
29. 하룻밤 가짜 마누라 계약
"그건 그렇고 점심은 무엇으로 할까요? 이 집에는 돈까스가 제법 괜찮아요."
"저도 그걸로 하지요."
은실은 미야자끼의 느끼는 시선이 싫어서 빨리 점심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다. 무슨 요구를 또 할지 몰라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곧 자루 소바를 곁들인 돈까스가 들어왔다.
"중석 씨는 잘 계신가요?"
은실은 자신의 얼굴과 가슴을 더듬는 듯한 미야자끼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마음에 없는 질문을 했다.
"아, 사꾸라이 사부로 상 말이죠. 여자 꽁무니나 따라 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하하하."
은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온시루 씨."
"예."
"기생 그만두고 무엇 하시려고 합니까?"
은실은 마침내 화제가 바라던 방향으로 간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이야기 했다.
"특별한 계획은 없고요. 저하고는 맞지 않는 직업 같아서 그만 두었으면 합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은실은 말이 나온 김에 확실하게 일을 성사시키고 싶었다. 미야자끼 중위의 힘이라면 어렵지 않은 일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꼭 그만 두고 싶다면 내가 힘이 되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만 두는지는 우선 알아야겠습니다."
"저는 아직 머리도 얹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얹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얹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생을 하겠다고 더 버텨 보았자 굶어죽기 알맞은 것 아닐까요?"
"그럼 내가 기생 권번에서 이름 빼 줄 테니까 그 전에 한 가지 일만 해 주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요?"
은실은 긴장해서 미야자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렵지 않습니다. 기생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면 흔적은 남겨야 할 것 아닙니까."
미야자끼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했다.
|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