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앉아서 부를게요."
중석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의 날개 위에 그대를 실어 보내리-"
멘델스존의 '노래의 날개 위에'였다. 부르기 어려운 명곡을 조선말로 놀랍도록 감정을 풍부하게 넣어 불렀다. 은실은 브루엔 선교사집에 있을 때 브루엔 선생과 형신이가 자주 부르던 노래라서 가사를 거의 외우고 있었다.
은실은 중석을 다시 보았다. 가수가 아니라 성악가 수준이었다. 성중석이라는 건달을 다시 보았다.
중석의 노래가 끝나자 이번에는 은실이가 가장 힘차게 박수를 쳤다.
"앵콜, 앵콜."
황매가 소리쳤다.
"사부로는 성악가야, 성악가. 조선 최고의 성악가다."
미야자끼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동경 유학시절 좀 불렀던 곡이라서..."
중석은 평소답지 않게 수줍어했다. 은실은 중석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날 밤 성중석은 은실의 기적 삭제 문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중석은 은실을 돕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에 미야자끼 중위를 데리고 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성중석이 미야자끼 중위를 데리고 나와 자리를 함께 한 뒤 한동안 성중석은 연락이 없었다.
은실은 수중에 있는 돈으로 할 만한 일이 무엇인가를 이곳저곳 다니며 알아보았다. 그러나 마땅한 사업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미곡 시장에 나가서 우선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번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어젯밤 진골목의 부자 나으리를 만났는데 요즘 미곡시장 경기가 괜찮다고 하던데..."
종심이가 은근히 권했다.
"이럴 때 형신 언니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경욱씨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종심이 말을 꺼내 놓고는 은실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았다.
"경욱씨는 만주 벌판서 몸이나 성한지..."
은실은 창밖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며 갑자기 수심에 찬 얼굴로 변했다.
"내가 잘 아는 청년이 한사람 있는데 그 사람이 사업 수단이 괜찮아. 한번 만나서 상의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종심이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뭐하는 사람인데?"
"경성제국대학 학생인데, 어머니가 아파서 휴학하고 내려와 있는 청년이야. 세상 물정을 잘 아니까 만나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어."
"이름은?"
"현식, 신현식이라고 낙동 사람이야."
"낙동?"
"마침 내일 낮에 내가 잠깐 만나기로 했으니 같이 가면 어떨까?"
이튿날 오후 은실은 종심을 따라 영화관 호락관 앞에 있는 '하도'(비둘기란 일본 말)라는 다방에 나갔다.
"종심씨 여기요."
맥고모자를 손에든 얌전한 청년이 종심이를 반겼다.
"내 친구 은실이예요."
은실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 은실이라고 합니다."
"전 신현식이라고 합니다. 종심씨 한테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현실은 일어서서 공손하고 예절바르게 인사를 했다.
"종심씨와 저는 경성가는 열차 안에서 처음 만났는데, 이젠 친구가 되었습니다."
"열차 안에서요?"
"예. 제가 경성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까 열차를 자주 타게 돼요, 그것도 값이 싼 야간열차3등칸을 자주 타거든요."
"창피하게 그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세요?"
종신은 현식을 향해 눈을 흘겨 보였다. 그러나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았다.
26. 촌년의 수난
"야간열차에서 만났다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나보다."
은실이 잔뜩 호기심을 보이자 현식이 마지못해 한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왜관을 지나 겨우 눈을 좀 붙이려는데, 옆자리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어요. 그랬더니 도리우찌를 쓴 중년 남자와 머리 땋은 조선 처녀가 말다툼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게 종심이였군요. 일본 중년 남자가 치근댄 것이었고. 하긴 종심이 인물이 워낙 달덩이 아니야? 크크크."
종심이가 신명여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김울산 여사의 심부름으로 서울 선교재단에 거류를 가져다주고 오는 길이었다.
사류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물론 알지 못했다. 선교재단에 가서 눈이 파란 서양 선교사를 직접 만나 서류를 전달하고 야간 보통 열차를 타고 대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종심이는 신명여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했었다. 그리고 달덩이 같은 인물 때문에 권번 기상으로 풀렸다.
"시비를 건 사람은 물론 일본 관리들이겠군요."
은실이가 앞질러 말하고 웃었다.
"남자가 일본 사람인건 맞아요. 고등계 형사라던가. 두 사람이었어요."
"그래서요?"
은실이가 이야기를 재촉했다.
"열차 내 임검을 하는 철도원 같기도 하고 형사 같기도 했어요. 고등계 형사건 철도 경찰이건 간에 조선 처녀를 붙들고 시비를 거는 것은 저의가 훤히 보이죠."
현식이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계속했다.
"흰 광목 저고리에 검정색 무명 치마를 입고 있더군요, 발에는 검정 고무신을 신었어요. 허리를 질끈 눌러 동여매었더군요."
"촌년으로 보기 딱 좋은 차림이지,"
종심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진짜 부잣집 맏며느리 감으로 보이는 달덩이 같은 인물에 불룩한 젖가슴은 광목 섶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눈을 찔렀어요. 사내라면 눈길을 한 번 더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자태였다구요."
"조선 아가씨가 가지고 있는 보따리를 풀어보라는 것이었어요."
"왜요?"
"경성에서 부산까지 아편을 운반한다는 정보가 있어서 검색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조선 처녀의 보따리를 풀어보라는 것이었어요?"
"글쎄 말입니다. 여행하는 사람이 보따리나 가방 안 가진 사람이 있나요? 그 중에서 하필 처녀 보따리를 풀라고 하는 것은 짓궂은 짓임에 틀림없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조선 처녀, 아니 종심씨는 절대로 보따리를 풀 수 없다고 버티는 거예요."
"정말 아편이라도 보따리에 있었나? 호호호."
은실이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자칭 일본 형사는 보따리를 꼭 움켜쥐고 결사적으로 버티는 종심씨를 더 골려주려고 보따리 움켜쥔 팔을 억세게 비틀었어요."
"아야!"
종심이 비명을 질렀다.
"코노야로. 안 내 놓으면 홀랑 벗기고 몸수색까지 할 거야. 내 놔!"
그래도 처녀가 버티자 이번에는 처녀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앞섶을 젖히고 주물럭거렸다. 종심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형사들은 들은 척도 않고 이번에는 치마를 훌렁 걷어 올렸다.
"조센진 안나(여자)들은 그 속에 아편을 숨겨 다닌다더니 네년이 그 년이구나. 어디 좀 들여다보자."
형사가 입가에 음탕한 웃음을 흘리면서 종심의 속곳을 확 찢어버렸다. 처녀의 부끄러운 곳이 살짝 들어났다.
"현식씨는 봤어요?"
"본 게 아니고... 저어... 보였다고 해야 하나.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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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