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들 역시 그의 처지를 미리 들어 알고 있는 터라 그가 수업 도중에 무슨 짓을 하든 내버려 두었다. 맨 뒷자리에 앉은 그는 수업 시간에 때론 졸고 때론 낙서만 하기도 했다. 아무도 그런 행동을 나무라지 않았다. 대체로 그는 제 공부는 제가 알아서 하는 형인 것 같았다.
주말이면 멀쑥하게 차린 신사들이 자가용을 타고 이사장 사택을 다녀갔다. 아이들은 그들이 서울에서도 유명한 과외 선생이라고 했다.
송전 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 교사들도 가끔 이사장 사택에 불려갔다. 대부분이 국어, 영어, 수학을 제외한 정치경제, 세계사, 국사, 기술, 물리, 생물, 화학 교사들이었다. 교사들은 이사장 사택에 불려가는 것을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에 따른 반대급부가 섭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한 해 동안 학교는 온통 오정식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10년 가까이를 혼자 몸으로 살았다는 여 이사장도 그 해에는 거의 내내 이사장 사택에 머물렀다.
또 하나의 큰 변화는 오정아가 속한 학년에서 일어났다. 중학 3학년에 올라가면서 민기는 그 얼굴이 하얗고 오만한 오정아와 한반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남녀 학생이 내놓고 잡담도 못했던 그 학교에서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남녀 합반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 학년 총 인원이 115명으로 단 두 반뿐이었는데, 한 반은 성적이 우수한 학생만 모아 만들고 나머지 아이들을 모아서 다른 한 반을 만들었다. 형식상으로는 1반, 2반이라 했지만 학생들은 자진해서 우반, 열반이라고 불렀다. 이 남녀 합반, 우열반 구성은 여 이사장의 주문이라는 후문이 있었다. 민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우반에 속했고, 여학생은 15명 정도밖에 안되었다.
“네? 뭐라구요? 독살 사건이라구요?”
어느새 돌아왔는지 순찰을 나갔던 김승만 경장이 전화를 받으면서 소리를 꽥 질렀다.
“이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송전 학교 총무과장이 뭐 독살 운운 하는데, 놓아기르는 개가 농약을 먹었다는 소린지... 하여튼 지서장께 보고 드리고 빨리 가 봅시다.”
통화를 할 때는 웬 장난 전화냐던 김 경장의 표정이 금세 하얗게 굳었다.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보고를 마치고 당황한 걸음으로 나오는 김 경장의 뒤에 대고 지서장이 주의를 주었다.
민기와 김 경장은 각자 오토바이에 올라 송전 학교로 향했다.
송전 학교는 낮은 구릉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서에서 오토바이로 넉넉 잡아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두 사람이 교문을 막 들어서는데 군청색 승용차가 황급히 교문을 빠져나와 읍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교장이 출타하나 보네.”
오토바이에서 내리면서 김 경장이 중얼거렸다.
승용차 안에는 한 남자가 웅크린 자세로 앉아 있었고, 양쪽 곁에서 두 남자가 그를 들여다보며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다.
“자네가 알아서 해 줘. 난 이런 일 하나도 몰라.”
김 경장이 총무과에 들어서기 전에 민기에게 사정을 하였다.
“저도 경찰 종합학교서 교육받을 때 배운 것밖에 아는 게 없습니다. 보안과에 잠깐 있었고 대부분 경무과에서 일했는걸요.”
두 사람이 총무과에 들어서자 나이 스물을 갓 넘은 성싶은 여직원이 총무과장이 있다는 교장실로 안내했다.
교장실은 총무과 바로 옆에 있었다. 학교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단층 건물에는 서쪽 끝에 교무실이 있고 그 옆에 총무과와 교장실이 동쪽으로 나란히 배치돼 있었다.
총무과는 전보다 두 배쯤 넓어진 것 같았다. 책상이 여섯 개나 있는 걸 보니 직원도 많이 늘어난 듯했다. 여직원의 말투로 보아 총무과장의 역할도 꽤 커진 것 같아 보였다.
“여기 증거물을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해 두었습니다. 이겁니다, 이걸 마시고 교장선생님께서 입에서 거품을 내뿜으며 속이 탄다고 비명을 지르셨습니다.”
김 경장을 보자마자 총무과장이란 사람이 커다란 찻잔을 들어 보이며 숨도 안 쉬고 떠들어댔다.
“이건 무슨 물입니까?”
김 경장이 예상과는 달리 차분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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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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