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창고에 많이 있습니다. 농업 실습 때 쓰는 약입니다."
총무과장이 대답했다.

"홍미선 씨, 자리를 뜬 시각을 정확하게 말해 주십시오."
"2교시가 시작된 직후이니까 떠난 시각은 9시 40분쯤이고요, 돌아온 것은 10시 30분이 안 되었을 거예요. 중학생들은 휴식 시간이라고 나와서 노는데 고등학생 반에서는 수업이 계속되고 있었으니까요."

중․고 모두 수업 시작 시각은 같으나 중학교가 45분, 고등학교가 50분 동안이어서 중학교 수업이 5분 빨리 끝난다는 것이었다. 휴식 시간은 중학생이 15분, 고등학생이 10분이라서 다음 수업은 다시 같은 시각에 시작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 시간에 수업이 없었던 선생이나 수업에 관계없이 학교에서 잡일하는 사람을 우선 조사해 봐야겠군요."

"또 있습니다. 밖에서 실습교육을 하고 있는 선생도 조사해 봐야 합니다."
마치 그 사람이 범인이라는 듯이 총무과장이 강조했다.
2교시에 수업이 없었던 선생은 미술, 교련, 중학교 영어 교사 셋뿐이었다.

교감 선생도 수업이 없었는데 교감은 군 교육청으로 직접 출근해 아직 학교에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총무과 직원은 총무과장을 비롯해 모두 여섯 명으로, 남자 직원 두 명은 교장 선생을 부축하고 병원으로 갔다고 했다. 교감을 뺀 세 명의 교사와 총무과장, 총무과 남자 직원 둘과 여자 직원 등 모두 일곱 명이 민기와 김 경장 주위에 둘러서 있는 가운데 교장실 문이 열렸다.
"저 사람이 오늘 실습이 있는 교사입니다."

총무과장이 문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안경을 쓰고 키가 훤칠하게 큰 사람이 서 있었다. 민기가 부임하던 날 카페에서 보았던 그 국어 선생이란 사람이었다.
"자, 여러분을 오시라고 한 것은..."

총무과장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연설이라도 하려는 듯 목소리를 착 내리깔고 말을 시작할 때 탁자 위의 전화벨이 울렸다.
"아, 넷. 알겠습니다, 교장 선생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화 속의 소리를 차렷 자세로 듣던 총무과장이 충성이 담뿍 담긴 어조로 답하곤 그 정반대의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스쳐가는 걸 민기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교장 선생님은 무사하시답니다. 잠시 위경련이 일어났는데 병원에서 주사 맞고 안정을 취하는 중이시랍니다."
총무과장은 영문도 모르고 불려왔다가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채 서 있던 교사와 직원들을 밖으로 내몰며 말했다.

"두 경찰관님, 아주 죄송하게 됐습니다. 평소에 건강하시던 교장 선생님이 갑자기 편찮으셨기 때문에 제가 별일 아닌 것 가지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곧 돌아오신답니다. 잠시 위경련이 나신 것뿐이랍니다. 여기 봐요 미스 홍, 손님들께 여지껏 차도 안드렸잖아. 거기 있는 약차 중에 오미자차를 따끈하게 데워 와요."
총무과장의 얼굴은 어느새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시름 놓았다는 듯 맘 놓고 쉬는 김 경장의 숨소리가 민기의 귀에 들려왔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 갖고 십년감수하게 하실 겁니까? 전화 받고 어찌나 놀랐는지 아직도 가슴이 뜁니다. 거 텔레비전에나 나올 독살이란 말을 전화에다 대고 하시니..."
김 경장이 엉겁결에 뜨거운 차를 마시느라 한 번 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툴툴거렸다. 총무과장은 만면에 비굴해 보이기까지 한 웃음을 듬뿍 담으며 미안하게 됐다는 말을 연신 해댔다.

(4) 송전 학교

"교장 선생님과는 안면이 있으십니까?"
총무과장이 억지로 싸주는 인삼 꾸러미를 들고 교문을 나서며 민기가 김 경장에게 물었다.
"있다뿐이야? 자주 만나는 편이지. 매번 봄가을 소풍은 물론이고 운동회, 개교기념일 등에도 문 교장이 한 턱 크게 내지. 면사무소, 농협, 우체국 직원들이 모두 모여. 우리 서에도 이번 봄 소풍 초청장이 와 있을 걸?"

"저기 학교 뒤편의 양옥은 누구네 집입니까?"
아까 다급히 교문을 들어설 때는 보이지 않았던 건물 한 채가 민기의 눈에 들어왔다. 호화스럽지는 않지만 꽤나 육중해 보이는 2층집이 언덕 위 과수원 한복판에 의젓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근사하지? 교장 사택이야. 안에 들어가면 더 멋있어. 아늑하고 고풍스러워."
김 경장은 그 집이 마치 자기 소유라도 되는 양 자랑을 했다.
"이사장 사택보다도 훨씬 좋군요."
"이 사람아, 주머니 돈이 쌈짓돈이지 뭘."
"주머니 돈이 쌈짓돈이라뇨?"

"아하, 자네는 모르고 있었구만. 교장 선생하고 이사장이 내외지간이야. 총각이 애가 둘이나 딸린 과부한테 장가가서 출세한 거라고 하더군."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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