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長恨夢)

'이수일과 심순애'로도 알려진 영화였다.
"아직 이른 저녁인데 이 영화 한편 보고 가면 어떻겠어요? 여기서도 심순애가 차인다고 하던데..."

은실의 말에는 약간의 가시가 돋아 있었다.
경욱은 약간 당황하는 것 같았다. 평소의 은실이 같지 않은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몸을 버리고 돈도 펑펑 쓰려고 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렇게 돈을 마구 써도 돼요?"

주춤거리는 경욱의 손목을 잡고 은실이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를 보면서 은실은 몰래 몇 번이나 눈물을 닦는 것을 경욱은 못 체했다. 심순애가 이수일에게 배반당해 발길로 차이는 모습에서는 소리를 죽이며 울기까지 했다.
영화를 보고 나온 두 사람은 향촌동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은 뒤 강호여관으로 다시 들어갔다. 

"며칠 계실 거예요?"
여관비를 치르기 전에 은실이 물었다.
"닷새만 있기로 하지요."
은실은 여관비를 치르고 경욱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깨끗한 다다미방이었다.
"낮에는 자세히 못 봤는데 방이 아주 깨끗하네요."
은실은 경욱과 단 둘이 방안에 들어서자 낮에 보다 더 어색해졌다. 창문을 열어보기도 하고 개켜져 있는 이부자리를 만져보기도 했다.
"앉아요."

경욱이도 어색하게 생각했던지 먼저 방바닥에 앉으면서 말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앉았지만 서로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낮에 일이 생각나서 자꾸 쑥스러워졌다.
은실은 고향 찔레꽃 그늘에서 오 주사 놀이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혼자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나 때문에 돈을 너무 쓰게 해서 미안해요."
경욱이 어색함을 깨고 말했다.

"제가 돈 좀 생겼거든요. 이럴 때 경욱 씨 좀 돕고 싶어요."
"돈이 생겼다고요? 무슨 일을 했길래..."
경욱이 말끝을 흐렸다. 기생이 돈 생길 일이란 건달하고 잠자는 것밖에 더 있겠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건 다음에 이야기 할게요. 기생 노릇해서 생긴 돈은 아니니까 염려마세요."
은실이 경욱에게 다시 가시 돋친 말을 했다.
"나 정말 기생 노릇 그만하고 싶어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닐 거요."
경욱이 말이 맞았다. 권번에서 이름을 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권력 있는 사람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어떻게 방법이 있겠지요."
"간도에서 황 대장 식구를 만나서 무슨 일을 하려고요?"
"여러 가지로 생각 중이예요. 만주에 가면 의탁할 곳이라도 있나요?"
"황병기 대장님이 이야기 해놓은 데가 있어요. 우선 거기 가서 의논해 봐야죠."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인가요? 조국..."
"맞아요."

"돈도 좀 필요할 텐데 제가 우선 좀 드릴 테니 가지고 가서 필요한데 쓰세요."
은실은 손가방을 열고 돈을 내 놓았다. 농산 권번장한테 미곡 취인권을 맡기고 빌려온 돈이었다. 오늘 쓰고 남은 70원이었다. 
"아니, 이렇게 큰돈을?"
경욱이 깜짝 놀랐다.

"걱정 말아요. 도둑질 한 것도 아니고 왜놈한테 몸 판 것도 아니니까요."
은실이 이번에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 큰돈을 나한테 다 주는 겁니까?"
"여비 빼고 나면 얼마 되지 않아요. 조선 독립을 위해 쓰시는 돈인데... 저도 조선 사람인데 조금은 보탬이 되고 싶어요."
"은실 씨 고마워요."

경욱이 은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은실은 기다렸다는 듯이 경욱의 품에 와락 안겼다.
- 이번엔 나를 무안 주지 못할 걸. 너도 거시기 달린 사나이인데 ... 
                                                                                      
23 내지의 망나니들

은실은 경욱의 허리를 부러져라고 세게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경욱의 입술을 덮쳤다. 기습을 당한 경욱은 얼떨결에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 은실이 나를 갈망하고 있었구나.

경욱은 자기가 얼마나 둔감하고 은실에게 무관심했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극장에 가기 전 발가벗고 들이댔을 때 그냥 겁만 났던 것이다.
- 아니야. 은실은 나를 보내기 전에 도장을 받아놓으려는 거야.
경욱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나 그 생각과는 모밍 열기를 띄기 시작했다.

은실은 경욱의 목을 껴안고 혀를 경욱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경욱은 꿈틀거렸다. 은실을 두 팔로 껴안았다. 
"윽!"
경욱이 놀라 신음을 토했다.
"이번엔 도망가지 못할거예요."
"으으, 으으. 잠깐만..."

경욱은 숨이 넘어가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은실을 가슴에서 떼어 놓았다.
"은실아. 우리 조금만 참자."
"참자고요? 언제 까지 참는 거예요? 조선 독립하는 날에 해 줄 거예요?"
은실이 토라졌다. 두 번이나 자존심이 형편없이 구겨지지 않았는가.
그러나 은실은 경욱의 신중하고 초인적인 인내력에 감탄했다.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은실은 경욱을 위해서라도 기생 명단에서 빠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권번 명단에서 빠지면 기생은 그만두고 밑천이 조금 생겼으니 다른 사업을 해서 진짜 큰돈을 한번 벌어보고 싶었다. 그 돈으로 경욱의 일도 돕고 싶었다. 은실은 조선 독립을 위해 왜 목숨을 걸어야하는지 확실한 이해는 되지는 않았지만, 경욱이 하는 일이니 옳은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욱과 헤이지고 권번으로 돌아온 은실이 종심이를 찾았다.
"종심아, 나 기적(妓籍)에서 좀 빠지고 싶은데 쉽지 않겠지?"
은실은 가장 가까운 친구 겸 선배인 종심과 먼저 의논을 해보았다.
"아직 머리도 못 올렸는데 기생을 그만두려고? 너 성 도련님하고 잤니?"
종심은 눈이 둥그레졌다.
"언니는 무슨 그런 말을 해요? 그런 막가는 왜놈한테 나를 바칠 것 같아요?"
"그렇겠지."

"그만 두려면 애시 당초 손을 떼는 게 옳은 일이 아닐까? 머리라도 올리면 쉽게 인연을 끊기가 어려울 것이고... 그렇다고 뭐 내가 규수 대접 받으며 살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야."
"기적에 이름 한 번 오른 사람이 아무리 세탁을 해도 꼬리표를 뗄 수야 있겠어? 하지만 관청의 승낙을 받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인데...."
"안되면 서울로 도망을 치든지."
"도망을 친다고? 어림없는 일이야. 그나저나 그만두고 할 일이라도 있냐? 우선 돈이 문제일 것이고..."

종심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생이 되는 것도 어렵지만 그만두는 것도 어려웠다. 부청의 일본인 말단 관리라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모두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큰 언니나 김울산 여사하고 상의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어?"
"이럴 때 형신이 언니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형신이 언니는 만준지 간도인지를 갔다면서?"

종심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대구가 타향인 종심이도 서로 의지하는 사람이 은실이 뿐인지라 자기 일처럼 걱정을 해주었다.
"사실은 나 돈이 조금 있거든."
은실이 망설이던 말을 했다.

"머리도 못 얹은 생짜가 무슨 돈이 있단 말이야?"
종심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으로는 호기심이 잔뜩 일어난 표정이었다.
"얼마나 되는데? 어떻게 생긴 돈인데?"

"한 9백 원 쯤 돼."
"뭐? 9백 원이나?"
종심이 입을 딱 벌렸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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