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이사장의 연세가 꽤 되었을 텐데...”

“통 내려오질 않아서 얼굴은 못 보았지만 아마 쉰 대여섯 된다지? 문 교장은 40 중반이어서 청년처럼 팔팔한데 이사장은 할머니가 다 됐대. 그게 창피해서 한 5년 전부터는 아예 이곳에 발길을 끊었다고들 수군거려.”

김 경장이 속삭였다.
어수선한 기분으로 오후를 보낸 민기는 오랜만에 원종일을 찾았다. 원종일은 수리를 끝낸 경운기를 시운전해 보이고 있었다.

“문 선생이 이사장하고 언제 결혼했지?”
“네가 대전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봄에.”
그렇다면, 그렇게 지극 정성을 다했던 오정식이 의과 대학에 들어간 후 바로 두 사람이 결합한 것이리라.

“문 교장이 병원에 갔던 일을 알고 있구나?”
자리에 앉자마자 던진 느닷없는 질문에, 왜 그런 걸 묻느냐고 궁금해 하지도 않고 준비했다는 듯 원종일이 대답을 하자 민기는 이유 모를 의심이 부쩍 생겨 힐책하듯 물었다.
“오 선생이 말하더군. 오정아가.”

원종일은 민기가 무언가 알아차렸으면 하는 표정으로 “오정아”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정아는 언제 여기에 왔지?”
“작년 봄에.”
“자주 만났니?”
“가끔.”

민기는 배갈 한 잔을 단번에 들이키면서 원종일의 표정을 살폈다.
원종일은 민기의 시선을 감지하면서도 고민이 가득한 자신의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정아는 시집 안 갔대?”
“아직. 곧 갈 것 같아. 남자가 많은가 봐.”
오정아에게 남자가 많을 거란 말에 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인 이사장 황정자를 빼놓은 듯 닮은 오정아는 얼굴이 희고 쌍꺼풀이 크게 져서 서양 인형같이 보이던 소녀였다.

오정아는 내리닫이 형식으로 디자인된 송전 학교의 교복이 촌스럽다고 허리부분이 잘록하게 들어가도록 수선해 입었고, 수업만 끝나면 바로 사택으로 뛰어가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봄 꽃잎처럼 연한 분홍, 또는 하늘빛처럼 맑은 파랑 옷을 입은 정아의 모습은 민기의 눈에도 만화의 주인공처럼 예뻐 보였다.

민기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어 벌써부터 턱 밑에 거뭇거뭇 수염이 돋아나고 목소리도 애 아범 같다는 소리를 들었던 원종일은 그때 다른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오정아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저수지 가에서 미끼도 없이 낚시하던 어느 날 원종일은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물속에까지 정아의 얼굴이 비친다”며 탄식한 적도 있었다.

오정아가 전학 온 지 일 년 만에 서울로 떠나가자, 원종일은 황소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민기는 그 이후로 서울 가서 야간 학교 다니겠다고 고집 부리는 원종일을 달래다 못해 호랑이 같은 그의 아버지에게 일러바쳐 겨우 붙잡아 놓기도 했다.

“유학 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프랑스서 디자인 공부하고 돌아왔다더군. 여기서 오래 살진 않았지만 고향이니까 그리웠던 모양이야.”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더 진척되지 않았다. 다만 민기의 가슴에 무언가 해결 못한 숙제라도 있는 듯 답답함만 가득 차게 해 주었다. 

(5) Cafe 솔밭

“거 뭐 다 끝난 일 갖고 신경을 쓰나?”

김 경장은 송전 학교에서 일어난 이번 사건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고 민기가 말을 꺼내자 핀잔부터 주었다. 강 순경 또한 관심이 안 간다는 듯 이제 막 시즌 초반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고 있는 프로야구 중계에서 귀를 떼지 않았다.

민기는 지서 문을 나섰다. 특별히 순찰할 곳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발길이 옮겨졌다. 어느 샌가 뚝뚝 떨어진 목련꽃잎이 사람들 발에 밟혀 갈빛으로 변색돼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솔밭 카페에 와 앉은 민기는 빛바랜 목련꽃잎이 자신을 이 집으로 이끌었는가 보다고 생각하며 혼자 피식 웃었다.

솔밭 카페는 훤한 대낮인데도 여전히 어둠침침했다. 그렇다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것은 아니나 밖의 싱싱한 봄기운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처음 왔을 때 느꼈던 가을 솔밭 같다는 인상이 더욱 강렬하게 들었다. 벽장식 대부분이 인공이 아닌 자연적인 것으로 꾸며져 있기 때문에 더욱더 도회지 한복판에 있어야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은 언제 문 열었습니까?”

민기는 자신의 경찰복에도 별 개의 없이 물을 날라 오는 카페의 여인에게 운을 떼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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